[오늘의 과학기술] 비밀을 지키는 종이접기, 레터락킹(Letterlocking)

2021.07.15 | 조회 1.46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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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다룬 시대극을 보면 붉은 촛농을 이용해 편지를 봉인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편지봉투가 열리는 부분에 촛농을 떨어트린 다음 거기에 인장 반지 따위를 찍어서 모양을 새기는 거지요. 일종의 보안대책인데요, 만약 누군가 편지를 몰래 뜯어보았다면 봉인이 망가져 있을 테니 '아직 이 편지를 아무도 읽지 않았음'을 보증하는 장치인 셈입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지요.

그런데 유럽에는 사실 이보다 훨씬 정교한, 예술의 경지에 오른 편지 보안 기술도 있었습니다. 레터락킹(letterlocking)이란 방법으로, 편지봉투를 쓰지 않으면서 편지지만을 복잡하게 오려내고 접어서 3D퍼즐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입니다. 레터락킹을 거친 편지지는 레터패킷(letterpacket)이라고 부르고, 보통 촛농으로 봉인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레터패킷을 풀 때는 어딘가 찢거나 훼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터패킷 만드는 영상을 한 번 보실까요?

"대거트랩(dagger-trap)"이라는 기술을 사용한, 아주 정교한 레터락킹입니다. 칼날 모양으로 얇게 잘라낸 종이(단검)를 여러 겹 접어낸 편지에 관통시킨 다음 붉은 실링왁스로 마무리했습니다. 레터패킷을 열다 보면 단검 부분을 뜯어낼 수밖에 없고, 펼쳐낸 편지에 단검 부분만큼 종이가 도려내져 있다면 누군가 먼저 열어봤다는 뜻이겠지요.

레터락킹을 하기 위해서는 접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종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레터락킹은 대략 13세기 무렵, 잘 접히는 종이가 보급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바티칸 도서관의 비밀 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레터패킷은 1494년에 만들어졌다고 하고요. 그리고 이런 유의 기예가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간단한 보안조치 정도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슬슬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17세기에는 레터패킷의 모양만 보고서도 보낸 사람을 짐작할 수 있는, 문인들의 '스타일'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서, 레터락킹은 사실 고문서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골칫거리입니다. 첫째로, 대부분의 레터패킷은 펼쳐진 상태로 발견됩니다. 편지를 받았으면 당연히 뜯어보지 않았겠어요? 아무리 예술적인 레터패킷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편지의 내용물이 중요할 테니까요. 그러니 잘 보존되고 훼손되지 않은 레터패킷 자체가 굉장히 드뭅니다.

두 번째 문제로는, 잘 보존된 레터패킷의 내용물을 확인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펼쳐지지 않은 17세기 레터패킷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자 유물인데 함부로 뜯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고문서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것은 고문서 연구자들에게는 거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레터패킷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잘 보존된 레터패킷이라니 절대 뜯을 수 없어!"와 "얼른 뜯어서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고 싶다" 사이를 오갈 거예요.

2021년 3월 2일, 엉뚱하게도 의료기술의 발달 덕에 고문서학자들이 번뇌에서 해방되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X선 마이크로토모그래피(X-ray microtomography, XMT)는 원래 치과나 정형외과에서 작은 골조직의 3차원 형상을 촬영하는 데 쓰는 기술입니다. 연구진은 17세기에 널리 사용되던 잉크에 철분이 함유되어 있다는 데 착안해서 X선 촬영을 통해 레터패킷의 어느 부분이 글씨이고 어느 부분이 종이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XMT는 일종의 CT 기법이기 때문에 레터패킷의 3차원 구조를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XMT를 이용해 17세기 레터패킷을 촬영하면 레터패킷의 접히고 오려진 부분을 전부 파악하면서 쓰여 있는 글씨까지 확인할 수 있는 거지요. 바로 위의 동영상이 레터패킷을 컴퓨터로 '펼쳐낸' 모습입니다.

레터패킷의 예시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etterlocking#/media/File:Letterlocking.jpg, CC-BY-SA 4.0
레터패킷의 예시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etterlocking#/media/File:Letterlocking.jpg, CC-BY-SA 4.0

이번 연구를 주도한 사람은 MIT 도서관의 희귀문서 보존 전문가(conservator)인 야나 담브로지오(Jana Dambrogio)입니다. '레터락킹'이라는 단어를 제안한 사람이기도 한데요, 바티칸 도서관 비밀서고에서 일하던 당시에 레터패킷을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레터락킹에 관한 유튜브 채널이나 웹사이트도 활발히 운영 중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방문해 보세요.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문화이지만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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