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걸 싫어하니 과일 맛을 모르겠다. 그렇게 달다는 딸기며 사과도 새침하게 새콤한 맛이 난다. 기분 내려고 먹는 건데 인상 찌푸리고 싶지 않다. 과일이야 원체 비싸니 오히려 잘됐다. 가을 겨울 봄 내내 아껴두었던 과일값은 여름에 털어 쓴다. 수박! 복숭아! 너무 좋아!
올해도 벌써 수박 두 통을 해치웠다. 혼자 살 땐 엄두도 못 냈다. 저 큰 수박을 어떻게 가르고 썰고 가지런히 담나. 최측근이 아니었다면 수박이 쩌억 갈라지는 소리 들을 일도 없었을 거다. 군데군데 이 나간 부엌칼로 수박 살을 야무지게 발라내는 최측근. 덕분에 밀폐용기 모양대로 예쁘게 담긴 수박을 고생 하나 없이 먹는다.
복숭아도 형편 되는 대로 사먹었다. 얼마 전에는 글쎄, 다섯 개에 7천 원밖에 안 하는 물렁이 복숭아를 샀다. 입에 넣자마자 사라질 만큼 달고 부드러웠다. 역시 복숭아는 물복이지 감탄하는데, 옆에서 딱복파인 최측근은 혼잣말을 한다. 아삭한 복숭아 네 개만 먹고 싶다. 다섯 개는 많고 딱 네 개만.
나는 딱복을 안 먹고, 최측근은 물복도 먹으니까 우리 집 복숭아는 맨날 물렁물렁하다. 이대로 여름이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아 퇴근길을 유심히 살폈다. 딱딱한 백도 복숭아를 파는 곳이 의외로 드물었다. 네 개에 만오천 원이나 줘야 했지만 팔아주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묵직한 크기에 괜히 마음이 흡족했다.
평소라면 최측근이 뚝딱 깎았겠지만, 오늘도 저녁 한참 지났는데 퇴근 소식이 없다. 요즘처럼 일이 바쁠 땐 끼니도 거르는 사람인데. 집에 오면 복숭아라도 바로 꺼내야겠다 싶어 칼을 잡았다. 자꾸 미끄러지는 복숭아 대신 내 손이 깎일 뻔하길 여러 번. 예쁘게 깎은 건 통에 가지런히 담고 비뚜름한 건 내가 먹었다. 이게 맛이 있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우리집엔 요즘 인상 찌푸려지게 시큼한 일 가득이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거라고는 과일을 깎아 주는 정도. 그 정도라도, 그 정도나마. 잘 들지도 않는 부엌칼로 거대한 수박을 썰고, 먹지도 않을 딱딱한 복숭아를 깎는다. 수박과 복숭아를 먹는 동안에는 마음이 달기만 하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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