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는 대개 뻔한 선택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한다. 영화보기, 음악 듣기, 책 읽기 같은. 튀고 싶어하던 나이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답을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던 건 무려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험심이 많은 아이인 줄 알았다. 좀처럼 집 안에 붙어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파리에 미치도록 가고 싶었다. 에펠탑을 보고 싶었다. 커다랗고 높은 것에 대한 동경이 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냉랭한 철 쪼가리로 만들어진 건축물보다 그 앞 초록 잔디밭을 뒹굴던 사람들의 여유에 매료되어서 나는 그 도시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벽면에도 노트에도 온통 밤낮의 에펠탑이 자리하던 때였다. 그 무렵 친했던 친구들과는 이십 대 언저리에 우리 함께 프랑스에 가자고 기약 없는 약속을 적어두기도 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마음껏 꿈꿀 수 있는 나이였다. 우리가 마치 영원이라도 될 듯 고작 일이 년짜리 인연인 줄도 모르고 소중한 건 다 꺼내어 보여주던 시절이었다.
지금 나는 그 시절의 친구를 보고 살지도 않고, 여태 파리에 발도 못 붙여봤지만, '파리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산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파리를 동경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다.
동경은 동경일 뿐이라는 걸 아이를 낳아보니 알겠다. 아이가 가져다준 행복은 물론 낳지 않은 사람은 영영 느낄 수 없는 기쁨이라지만, 오로지 이 행복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은 상상 그 이상이니까. 꿈꾸던 육아가 어떤 모양일지 몰라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으니 그 간극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 되었다. 사랑해서 시작한 일이 나를 괴롭게 만드니 마음이 힘들다. 혼자 있어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진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날도 찾아온다.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다.
희생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첫 고양이를 집에 들이던 날 알았다. 동물을 기르는 일에 책임이라는 단어가 뗄 수 없이 붙어 다니지만, 이건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냥 그렇게 되는 거구나.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적당히 내 언어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소매치기당하고, 움직이는 길목마다 죄다 더러운 데다가 말이 통하는 사람은 없고. 몸이 쉬면 여기까지 와서 뭐하는 거지 싶어, 무리해서 몸을 쓰면 바로 아파 버리는데 이런 나를 돌볼 사람은 없으니 서러워진다. 여행지의 사정에 따라서 발이 묶이는 일은 부지기수다.
이정도의 말에도 용기가 없다면 이 티켓 끊는 것을 주저하길 바란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깨닫게 된 것은 글로도, 아니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도, 지인의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감을 대체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 안에 들어가 숨 쉬고 살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특별함이 매일 되는 순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는 백만 개는 더 알게 되니 모를 때가 좋았다 싶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애를 낳는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며 존중한다. 더 나은 유전자의 조합이나 국가의 숫자를 위해서 그래도 아이는 낳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진심으로 말리고 싶다. 그 여행이 누군가의 생을 구했다는 미디어가 만든 환상이나 힘들었던 점은 쏙 빼놓고 좋았던 점이나 아름다운 풍경만을 전시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혹은 모험을 도전해야 가치 있는 삶인 것처럼 부추기는 주변인들 때문에 의심 한 톨 없이 자연스럽게 아이는 있어야지, 싶은 거라면 그런 생각은 버려주면 좋겠고.
이리도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파리 드림’을 포기하지 않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는 파리 신드롬에 걸린 사람들과 나는 웃기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에 바라나시의 어느 카페에서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겨둔 걸 봤다.
'인도에 있는 내내 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천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다시 떠날 날을 가늠하고 있다. 그리하여 벌써 세 번째, 이 이상한 나라에 서 있다.'
힘든 길을 알면서도 더 걸어보겠다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말 안 통하는 이들 사이에서 답답해하고, 아이들이 만드는 사건사고 안에서 종일 억울하다가 이내 무력해지지만, 나는 이 고생을 또다시 사서 하고 있다는 거.
가보지 않은 길은 영영 알 수 없다는 말에는 동감한다. 이제는 정보가 많고 투명해져 쉽게 공포를 읽고, 불행을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완연한 낭만을 꿈꾸기는 어려워졌지만. 이 모든 걸 알고도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을 지는 결국 내가 선택하는 거니까.
후회는 그 도시에 서서 해도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분명 늦었을 거다. 이미 글렀다. 처음 만난 사람의 웃음 같은 것에 나는 내 많은 것을 팔았다. 내 걸 나보다 더 아까워하는 동반자가 있다는 건 이 여행에서 커다란 위로다. 잘 맞는 여행 파트너가 있다면 녹록지 않은 순간도 비교적 순조롭게 넘길 수 있다. 감히 다음을 기약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내 주변에도 있다. 그들의 여행 가방은 내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 무거워 보인다. 슬퍼 보인다.
머물지 않는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절대로 있다. 그러나 현생이 퍽 괜찮다고 한다면, 지금의 내 삶이 너무 사랑스럽고 가엽다면 당분간은 이 모든 걸 미뤄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나이가 조금 차고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생길 때까지 유예하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선택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젊을 때나 나이 먹어서나 시행착오는 그대로라고 할지라도 대안은 많아질 테니까. 직접 몸을 부딪히지 않고도 인도 일주일 여행을 비행기로 다니던 어느 노부부처럼 좀 사치 부리며 편리하게 다닐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이 여행을 먼저 다녀온 사람이라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제말도 충분히 경계해 주셔라.
여행 한 번 못 가본 사람이라고 꼽주는 세상은 이제 우습지. 내가 해봤으니 경험해볼 만한 거라고 대책 없는 낭만을 선사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파렴치들로부터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여행 한 번 못 가본 게 어때서. 애 안 낳는 게 뭐 어때서.
가만보면 현재의 삶이 무척 만족스럽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은 떠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않더라. 우리는 유약하므로 결국 타지에서의 기억이나 핏덩이 하나를 덧붙여서 기댈 추억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의미가 없다곤 말하고 싶지 않고. 사서 고생하는 동안은 이 낯선 도시가 제법 아름답고 주로 우울하지만,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 제집으로 돌아와 다시 나의 길을 걷는 날에는 우리가 한 모든 짓이 추억이 되어있으리라. 이맘때 이곳이 참 좋았지, 저곳도 좋았어. 그곳에서의 시간을 자랑삼아 남은 생을 살아갈지도. 그러고 난 다음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내가 철탑 앞 잔디밭에서 소년과 뒹굴고 있을지 정말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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