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매정한 취향수집

제 27회, 결심

2022.07.01 | 조회 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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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네, 맞습니다. 오늘은 영화 <헤어질 결심> 이야기를 하려 해요.

개봉한 지 딱 3일이 되었는데요. 구독자님은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개봉일에 조조 상영으로 보고 왔답니다.

 

그날은 꼭 영화를 봐야만 했어요. 저는 묘한 인연을 쉽게 믿곤 하는데요. 매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생일이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찾아오기도 해요. 마치 운명처럼요.

 

이제 꽤 오래 되어버린 어느 유월의 생일날, 영화 <옥자>가 개봉했었고요. 몇 년이 또 흐른 뒤에는 당시 가장 좋아하던 가수의 공연이 있었어요. 홀로 들떠서 '생일 축하 공연이네!' 하며 갔었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흐른 날, <헤어질 결심>이 개봉했답니다. 이건 뭐랄까, 제가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이 준 축하처럼 느껴져서 꼭! 휴가를 내고(중요합니다.) 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헤어질 결심, 2022
헤어질 결심, 2022

 

 

구독자님께서도 영화관을 찾길 계획하고 계실 것 같아요. 이 편지를 받아보시는 분이라면- 하며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아마 제가 살아서 볼 모든 영화 중 가장 독창적인 연출이 아닐까 싶어요. 전문가도 아닌 제가 '감히' 어떤 말을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제가 기대를 너무 높여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건 맞아요. 

 

영화를 보고 출근해서 걸작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요. 동료 분이 퇴근 후 보러 가신다고 했어요. 저는 퇴근길에 '내가 너무 호들갑 떤 거면 어떡하지. 안 좋아하시면 어떡하지.' 하며 엄청 걱정했고요.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어떠셨어요?!'하며 물었는데, 다행히도. 저의 감상에 공감해주셨답니다. 그러니 오늘도 호들갑을 떨어도 구독자은 분명 실망하진 않으실 거예요.

 

 

일단 구독자님께서 영화를 보러 가신다는 전제를 하고요. <헤어질 결심>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앞서 적었듯 이런 영화에 저의 부족한 표현을 늘어놓기가 너무 송구스러워서요. 영화에 관한 여러 인터뷰들을 모아 전해드리려고 해요.

 

저는 창작자의 이야기를 듣는 걸 정말 정말 좋아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창작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 하지는 않는 사람과, 저처럼 낱낱히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창작자라면 기꺼이 작품에 대해 세세한 정보를 전하는 이와, 작품 외에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길 원치 않는 이. 저는 창작과 작품 자체를 동경하기에 그 어느 쪽이든 즐기긴 하지만요. 골라보자면, 그런 동경을 기반으로 하는 궁금증이 너무나 많아 낱낱이 파헤쳐주는 것을 조금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구독자님은 어떠신가요?

영화 감상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래도 어느 정도 생각의 꺼리를 줄 수 있을만한 문장들을 몇 가지 모아왔어요. 여러 인터뷰에서 발췌했지만 결국은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늘어놓게 될 것 같아요.

 

 

 

배우들은 우리와는 다른 인종이라서 인물의 배경과 이력을 논리로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별것도 아닌 것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하기도 한다. <스토커>를 찍을 때도 희한한 경험을 했다. 당시 배우 매슈 구드도 본인의 캐릭터를 잘 모르겠다고 앓는 소리를 좀 하더니 어느 날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가 술집 벽에 걸려 있던 싸구려 초상화,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유화를 보더니 바로 저거라고 하더라. 거기서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다. 아마 박해일도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피부에 와닿은 순간이 있었을 거다.

 

 

창작자가 말하는 또 다른 창작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게 뭔데? 뭘 느꼈는데?' 하며 캐묻지 않는 태도에서 거장의 초연함과 여유, 배우를 향한 존경이 느껴졌달까요.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내는 천재이시면서(!) '우리와는 다른 인종'이라고 표현한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성정이 보이기도 해요.

 

사실 <헤어질 결심>은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 탕웨이, 박해일 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합니다. 그 둘이 캐스팅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 모험을 해낸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이 두 사람이 아니라면, 이 배우들이 연기한 캐릭터의 설정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짜릿할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박해일 20~30m 거리에서 본 탕웨이씨는 온몸에 힘이 빠져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송서래 같았다. 어려운 작품인데 초반부터 발목을 삐어서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을 수도. 옆에 앉아서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정작 가까이서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프로니까 탕웨이의 고민은 탕웨이만의 숙제로 남겨줘야겠다! 그래서 “하이!”만 하고 간 거다. (웃음) 어느 날 탕웨이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기할 때 상처를 입어야 그 캐릭터와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고. 역할 속으로 들어가는, 다소 낯설고 힘든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배우의 기질을 이해하면서 왜 박찬욱 감독님이 탕웨이 배우를 송서래 캐릭터와 연결시켰는지 하나씩 매치가 됐다.

탕웨이 당신이 바로 그 상처를 준 사람이다! (웃음) 그날 해운대 에서 내게 그렇게 행동한 건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의도가 아니 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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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거긴 동백섬이다. 누구나 아는 길을 알려준 것뿐이다. 배우는 촬영이 끝나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지 않나. 굳이 내가 따로 불러내는 건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상대 배우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 싶어서 산책길을 소개해줬다. 내가 알려준 산책길을 탕웨이씨가 흔쾌히 혼자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게 내게는 간절하게 필요했던 소통이었다. 그런 작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면 좀더 어색한 관계로 결과물이 나왔을 거다.



두 배우의 인터뷰에서는 이 부분을 참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없죠. 배우라는 직업은 다른 삶을 전문적으로 살아보고,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고요. 그런 일상과의 간극 때문인지 직업 자체가 더욱 멀어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직업인들이 자신만의 접근법에 대해 말하는 게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역할처럼 상처를 입으려는 사람과, 힘들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 상대방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하면서도 같이 산책하는 것이 아닌 산책길을 소개해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만남만으로도 <헤어질 결심>은 충분히 흥미롭습니다.

 

 

 

탕웨이 사실 박찬욱 감독님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독님은 마음속의 온유(溫柔)한 사랑을 대놓고 보여주는 게 쑥스러워 수사극 방식으로, <안개>라는 노래로 사랑을 표현하는 거다. 이전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포장한, 피가 낭자한 감독님의 영화를 볼때도 오히려 만화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온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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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도 계속 이야기했지만 감독님의 인내심에 정말 감사드린다. 이렇게 완벽한 시나리오에, 완벽한 배우와 스탭들이 있는 현장을 내가 또 경험할 수 있을까? 배우 인생에서 이렇게 완미(完美)한 현장을 만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완미-하다. 통역 때문에 쓰인 표현일까요? 한국어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라, 영화 속 대사처럼 더욱 귀에 박혀 기억하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움을 완성했다는 것일까요, 아름다움의 정수라는 뜻일까요. 직업인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뒤에 저런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어느 정도 믿을만한 작품이겠구나 확신하게 합니다.

 

 

 

 

의미가 전달된다고 해서 그 말이 정확하게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뜻을 모르고 바라봤던 서래의 표정, 손짓, 발짓, 어조들을 기억에서 불러냈다가 방금 들은 말과 결합해야만 통합된 의미와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다. 그것이 참 특이한 영화 관람의 체험일 것 같았다. 시각 요소와 청각 요소를 관객이 사후에 능동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경험.

 

정서경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서 제목을 떠올릴 때가 많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그 얘기를 한 것이다. '이 때 서래가 '헤어질 결심'을 한 건가요?' 이런 말을 하다가 '헤어질 결심'이라는 말이 제목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래서 제목이 됐는데, 제가 맘에 드는 이유는 관객들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보통의 사람들이 '결심'이라는 말을 할 때 성공하는 것이 드물지 않나. 살 뺄 결심이 잘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결심은 하지만 실패로 연결되는 그런 단어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끝내 헤어지지 못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고통스럽게 헤어지거나 그런 생각이 바로 연상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얘기하기도 하는데 바람직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말이든 글이든, 영화든 의미 전달이 전부는 아닙니다. 전달만으로 완성된다면 오독과 곡해라는 것은 없겠지요. '서래'는 탕웨이 배우가 맡은 중국인 여성입니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고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감상의 장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것을 기꺼이 견디고 마침내 해석할 때가 오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말이 통하고 언어가 가닿는다는 것의 환희를 느끼게 하죠.

 

처음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을 듣고 '이게 박찬욱 영화의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굳이 결심하지 않고도 헤어질 영화를 만드실 분 같은데 말이에요. 영화를 본 뒤에 문득, '헤어질 결심'이라 말하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그보다 더 파괴적인 결심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헤어짐은 보통 쌍방을 말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어느 한쪽이 해내면, 끝나버리는 것이니까요.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다룬 것 같기도 해요. 둘 중 한 명만 헤어질 결심을 하더라도 이미 헤어지고 있는 중이지요. 진정 이별할까 걱정하면서도 결심과 의문이 드는 순간, 방향이 정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헤어질 결심'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반대로 사랑에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까 고민하게 합니다. 대부분 사랑은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것이라고 표현하죠. 하지만 헤어짐 보다도, 사랑을 결심하게 하는 순간은 얼마나 무서운가요. 잘게 젖어 드는 것을 넘어,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결심.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더라도 '사랑해'라는 말을 꺼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할 테지만, 마음을 참지 못해 발화하고야 마는 다짐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위험한가요. 헤어짐은 언젠가 극복될 거라 믿지만 사랑은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언제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는데요. 여기서 더 적다가는 영화의 핵심마저 꺼내버릴 것 같아요. 그러니 이만 줄일게요.

 

영화를 보고 오신다면 구독자님의 감상평도 함께 나눠주세요.

혹시 저처럼 인생의 걸작으로 여기실지 궁금하니까요.

 

그럼 편안한 금요일 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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