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현재 서울의 기온은 영상 7도의 비교적 따뜻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다. 겨울의 끝이 다가와 이제는 제법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꽤나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직을 했고 코로나로 인해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겼고 엄마가 암수술을 받았다. 엄마와 다투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이를 악물고 인내심을 발휘했다. 엄마를 비롯한 그 누구와도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힘도 없었고.
2020년 여름 쯤 서울에 상경했으므로 서울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인 셈이다. 어쩐지 유독 혼란스러운 겨울이었다. 꼭 서울 살이라서 그렇다기보다 그냥 이런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 무렵 낡고 작은 고시원 방에서 홀로 맞이했던 겨울의 혼란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때의 혼란과 혼돈은 뭐랄까. 일견으로는 어쩐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스무 살 인생의 어떤 부록이랄까. 번들상품이랄까. 아는 것이 없었고 안다고 믿었던 것들이 모조리 거짓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나고 돌이켜보면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도통 명확한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던.
가끔 겨울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어쩐지 심장 부근이 뻐근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수많은 겨울을 지나는 동안 그 계절에 일어난 사건들이 나도 모르게 어떤 먼지처럼 심장 밑에 쌓여 간 것은 아닐까. 가끔 낡은 창고 문을 여는 것처럼 겨울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그 사건의 먼지들이 공중으로 피어오르곤 하는 것 같다. 매년 피할 틈도 없이 그 먼지에 쿨럭이곤 한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제법 많은 겨울들을 지났으니까.
몇 년 전 가을과 겨울의 경계 쯤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수도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1시간 쯤 걸리는 곳에 위치한 근교 도시였다. 나는 노랗고 넓은 낙엽을 밟으며 근처 도서관에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스페인의 늦가을엔 자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평소 조용하던 도서관은 흐르는 빗소리로 가득 차 온통 소란스러워졌다. 도서관 한쪽 벽과 천장이 유리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떨어져 흐르는 빗소리가 넓고 높은 도서관 내부를 계속해서 울렸다.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노랗고 붉은 낙엽들에 나는 어지러웠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노트북으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썼다.
오래전엔 겨울이 다가오면 슬플 준비를 하곤 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싶어서 울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을 고르기도 했다. 슬픈 영화나 소설들을 볼 준비를 하고 짐짓 평온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낸다. 집에 얼른 돌아가 조용한 곳에서 마음껏 울 수 있길 기대하면서. 그때 나를 울게 했던 영화들을 기억한다. 영화의 종류나 태생은 상관없었다. 헐리우드 영화든 어디 유럽의 예술영화든 그저 나를 슬프게 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일본 영화나 소설들이 많았던 것 같긴 하다. 습관처럼 좋아하는 영화와 소설들을 고르고 또 새롭게 보고 싶은 영화와 소설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런 일들을 오래 계속해왔다. 겨울이 다가오면 오래된 슬픔들을 수집했다. 공들여 수집된 슬픔은 포르말린에 담긴 상어처럼 더 이상 두렵거나 위험한 존재가 아니니까.
지난 2021년 9월, 미국 North Dakota의 Fargo에 살고 있는 Bill Fischer는 4일 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트럭을 열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의 자동차 엔진룸과 후드는 가을을 맞이해 한창인 호두로 가득 차 있었다. Fargo에 서식하는 붉은 다람쥐의 소행이었다. 2013년부터 근처 호두나무들의 수확량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근교에 서식하고 있는 붉은 다람쥐(어떤 녀석인지는 모른다. 녀석들 일지도.)가 그의 트럭을 식량 은닉처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Fisher는 Washington Pos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부러 호두나무에서 최대한 멀리 차를 가져다 두었는데도 달라지는 건 없더군요.” 그렇게 트럭에서 발견된 호두의 양은 약 42갤런(약 159리터)에 달했다. 버클리 대학교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붉은 다람쥐는 식량이 부족한 추운 겨울을 대비해 각종 견과류와 먹이들을 유형별로 각기 다른 곳에 나눠 숨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Fischer는 거의 2년마다 자신의 트럭에 호두를 숨기는 다람쥐의 만행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트럭 후드 아래 충분한 공간이 있고 숨어들기 쉽기 때문에 다람쥐가 자신의 트럭을 은닉처로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비슷한 조건의 트럭들이 많이 있는데 왜 자신의 트럭인지는 모르겠다고. 그는 이맘때가 되면 발견한 호두를 바로 치우지 않고 호두나무에서 호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경험 상 호두 수확이 종료되기 전엔 트럭을 청소해도 다람쥐가 다시 가져와 채워 넣을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Fischer는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연락온 사람들에게 정리한 호두를 무료로 나눠줬다. 매번 청소하기가 귀찮고 힘이 들지만 그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매번 어떻게 그렇게 웃어넘길 수 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이런 일에 웃지 않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말했다. (“Life is too short not to laugh about it.”)
이 이야기에 구태여 덧붙일 말은 없다. 호두를 슬픔이나 겨울로 치환해서 읽어도 무방하다.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겨울을 준비하고 어떤 식으로든 겨울을 나고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것이다. 이따금 트럭 후드 밑에 숨겨둔 호두나 포르말린에 담긴 상어처럼 슬픔들을 박제하면서. 또 별 일 없다는 듯이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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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스타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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