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매정한 취향수집

제 39회, 가을

2022.09.23 | 조회 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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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비로소 가을입니다. 정말, 가을이에요. 이 말을 쓰면서도 웃고 있어요. 드디어 지난한 여름이 끝났어요!

 

가을 초입에 걸리니 하늘이 너무 예뻐요. 아직 여름의 푸릇함은 간직한 채 적당히 서늘하고, 때론 너무 춥다고 호들갑 떨기도 하는 이 시기가 좋아요. 자주 고개를 들게 되는 계절이기도 하죠. 요즘 하늘 자주 보셨나요? 저는 하루에 한 장씩 꼭 사진을 남겨두고 있어요. 혹시 미처 바빠 머리 위를 살필 겨를이 없으셨을지도 모르니, 구독자님을 위해 사진 몇 장 남겨 두어요.

 

 

 

 

매일같이 날씨 이야길 하면서도 질리지 않아요. 편지에도 적고, 말로도 전해요. 늘 새롭게 나누고 싶은 것들이 생겨요. 특히 가을은 매번 기다리게 되고, 매번 아쉬워요. 항상 찾아오지만 짧게 머무는 것들은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요. 가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도 한 달 남짓밖에 되지 못하겠죠? 찰나의 가을에 온전히 물들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저는 땀이 식는 날씨가 시작할 때부터 가을 맞을 준비를 해요. 오늘은 저의 가을 준비물을 알려드릴게요.

 

 

우선, 일 년이 지난 새에 플레이리스트 위로 밀려버린 가을 노래를 다시금 발굴해야 합니다. 가을 노래는 왠지 아침에 듣고 싶어요. 청명한 하늘에 코끝이 상쾌해지는 아침 바람을 잔뜩 들이켜야 비로소 가을이구나- 하니까요.

 

 

한영애 - 가을 시선
이제는 모두 돌아가 제자리에 앉는다 불타는 열정에 가리워졌던 고운 얼굴들이 미소를 보내는 시간 떠나간 착한 연인들 서로 안부를 묻고 다락방 전설이 끝나기 전에 그리운 손을 잡고 고맙다 인사를 하네 해는 유리 거울로, 달은 그림자 너머 별은 벌거벗는 이 가슴에 깊어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평화롭게 반짝이면서 안으로 뜨네 사랑, 아름다운 길 용서를 만드네 드높은 하늘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양희은 - 가을 아침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눈 비비며 빼꼼이 창밖을 내다보니 삼삼오오 아이들은 재잘대며 학교 가고 산책갔다 오시는 아버지의 양손에는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가 하나 가득 딸각딸각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엉금엉금 냉수 찾는 그 아들의 게으름이 상큼하고 깨끗한 아침의 향기와 구수하게 밥 뜸 드는 냄새가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파란 하늘 바라보며 커다란 숨을 쉬니 드높은 하늘처럼 내 마음 편해지네 텅 빈 하늘 언제 왔나 고추잠자리 하나가 잠 덜 깬 듯 엉성히 돌기만 비잉비잉 토닥토닥 빨래하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동기동기 기타 치는 그 아들의 한가함이 심심하면 쳐대는 괘종시계 종소리와 시끄러운 조카들의 울음소리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뜬구름 쫓았던 내겐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단연, 가장 사랑 하는 가을 노래들입니다. 소리 자체가 맑은 가을날을 닮았죠. 다정한 가사도 빠트릴 수 없어서 다 옮기고 말았어요. 아침 출근길, 집을 나서자마자 듣는 첫 곡들이에요. 투명한 가을날 오후를, 가을 아침을 닮은 노래들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가을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들으면, 그렇게 집을 좋아하는데도 아침이 올 때까지 집에 '갇혀있던' 느낌이 들어요. 계절에 대한 감상을 전하는 것으로 해방감마저 주는 음악을, 어찌 싫어하겠어요. 부디 구독자님의 플레이리스트에도 최근 목록에 자리하길 바라요. 혹시 이미 듣고 계셨다면, 정말 반가워요. 너무너무 반가워서, 포옹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가방 한 켠에 넣어다니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만끽하는 듯한 기분이 되는 시집 한 권도 챙겨야지요. 가을은 보통 붉고 노란색으로 표현되지만 저는 자주색이야말로 가을의 표상이라고 생각해요. 이 시집은 자주의 외모를 가졌답니다.

 

이 가을의 무늬 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가을이 새로운 무늬를 입을 때면 잃어버렸던 당신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과오를 계절의 무늬 뒤로 숨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가냘픈 길은 마음일지도 몰라요. 사윌 때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그저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할 거예요. 마음을 담아야, 무엇이 사그라질 때까지 지켜볼 수 있지요. 그렇게 지켜보는 것에는 대개 마음을 넘어 사랑이 담깁니다. 우리는, 특히나 요즘은 어떤 걸 진득하니 안고 있기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런 미련을 가을이라는 계절 핑계 삼아 낭만으로 치환해보기도 하고요.

 

가을은 더 마음을 쓰고 싶고, 뭐든 더 잘 쓰고 싶은 계절이에요.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언제나 부족하다 느끼지만 낭만적인 날씨와 하늘빛에 저의 능력은 더욱 작아 보입니다. 언제 작지 않았던 적이 있나 싶긴 하지만요. 유독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계절이에요. 좋은 바람이나 맞고, 예쁜 하늘이나 보고, 녹색이 갈빛으로 물드는 것이나 지켜보면서요.

 

 

마지막 가을의 준비물은 냄새입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스밀 때의 계절 냄새를 가장 좋아해요. 늦게 잠드는 새벽, 창문 틈새로 들어온 가을 냄새를 맡으며 이르게 꺼낸 솜이불을 덮을 때 가을이 시작됩니다. 상쾌함을 상쇄할 묵직한 향수도 챙겨야지요. 지난겨울 바닥을 보인 머스크향 향수를 다시금 채워놓으면, 가을을 맞았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준비물을 모두 갖췄다면 마음의 준비로 마무리합니다. 지나간 계절을 후회하지 않기. 지는 낙엽에 마음도 물들기 쉬운 때이니까요. 미련 많은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웃으실지도 모르겠어요. 미련보다는 후회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미련은 내가 얼마만큼 마음을 썼는지에 대한 침전물이라고 생각해요. 미련과 후회는 전혀 다르고요. 후회는 그 가라앉은 것들을 어떻게든 다시금 띄워내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요? 이미 백 톤 무게의 마음에 묶여 가라앉았는데 말이에요.

 

후회에 더불어 포기하지 말자고 되새깁니다. 며칠 전 세상에 나온 노래에 또 울어버렸거든요. 이제 포기는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 맡겨요. 바로 절망. 절망이여, 나를 포기하여라! 끝에 꼭 느낌표를 붙이고 싶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좋은 글보다 좋은 노랫말을 만났을 때에 '나도 저런 말을 쓸 수 있을까'하는 좌절을 맞닥뜨려요.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잘 쓸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사라지는 거죠. 요 며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의 새 노래가 마구 쏟아져 나와서, 저는 백스페이스를 마구 눌러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래도 꾹 참았어요. 그러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 제 나름대로 버티며 해보는 방법이 생긴 것 같아요. 기꺼이 내보이기 힘들지만, 그 마음을 참고 용기라 부르기 민망한 용기를 내보는 거죠. 무언갈 만들어 꺼내 보이는 일이 아닐지라도 모두에게 일상은 하기 힘든 일을 버텨내고, 마음을 다잡는 것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뭐든 해내는 건 힘들어요. 그래도 막상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무던히 해낼 수 있더라고요. 오늘도 또 한 번 하루를 버텨내며 배웠습니다.

 

 

오늘도 가을을 핑계로 주절주절 적은 편지를 보내요. 구독자님의 가을은 어떤 소리로, 어떤 기록으로, 어떤 냄새로 채워지나요?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면, 우리의 편지가 서늘함을 쫓을 마음을 보탠 것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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