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과 회고와 <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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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독서나 전시 관람 등의 취미와는 견줄 수조차 없다. 내게 영화라는 매개체는 단순히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힘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라는 종에 뚜렷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 이후로 소중한 휴일에 시간과 금전을 써서 굳이 ‘인간’이 출연하는 ‘어떤 것’을 시청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영화가 있겠지만 대부분 극장에 걸리는 상업영화는 나에게 단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로 다분한 ‘스트레스 집약물’일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겸연쩍게도 매년 영화제를 다녀오곤 한다. ( 유월의 무주 산골 영화제도 갈 생각이다. ) 상영작들 중 나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아직 없었지만 그저 낯선 지역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정도로 생각하며 그 주변의 것들을 즐기기 위한 이유로 그곳을 찾는다. 고양된 사람들의 표정과 맛있는 술, 기념품, 연계된 전시 같은 것들 말이다.
가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벅차다. 두 시간이 넘어가면 급격히 떨어지는 집중력이 그렇고, 같은 장소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관람 방해 요소 때문이다. 최근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 우연과 상상 >을 프라이빗 관에서 보았는데, 채 다섯이 안되는 관객 중 앞 좌석에 앉은 이의 지나치게 거슬리는 혼잣말과 자아 담긴 웃음소리가 작품에 방해될 정도로 불쾌했다. 그러므로 나는 엄연히 말하자면,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보다 집에서 홀로 보는 영화여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내가 작년부터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덩그러니 있는 동안 사실상 넷플릭스 말고는 달리 하고싶은 게 없기로서니와 그 무기력한 시간들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식이었다. 주로 누가 좋았다고 했던 작품을 먼저 보았고,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다음으로 보았다. 선호하는 장르는 단연코 {로맨스/드라마}인데 숙소에서 본 스물몇 편의 영화 중 <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가 꽤 좋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같이 이야기해 보아도 재밌겠다.
‘영화’에서라면 필히 실제보다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고증에 기반하여 찢어지게 현실적인 작품은 구태여 접하고 싶지 않다. 때문에 소설 원작의 영화를 즐겨 보는데, 모처럼 구독자님을 위해 기억에 남는 영화 두 편 골라보았다. 2008년 개봉한 스티븐돌드리 감독의 <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와 (앞에서도 언급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21년 작 < 드라이브 마이 카 >. 전작의 경우 십년이 넘는 공백이 생겨 어제 다시 보았는데 놀랍게도 두 작품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단편이 작품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에서 다루는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그렇게 무얼 시작하면 속속들이 알기를 원한다. 감독이나 등장인물이 발화한 그림이나 음악, 영화, 소설을 톺아보고 나면 작품이 한층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이야기 속에서 소재로 삼은 것들을 구태여 들춰보았을 때 대체로 그것들은 오래 사랑받고 ‘보장될’ 만 함에 틀림없었다. 아래는 두 영화에서 언급된 체호프의 두 단편을 읽으며 밑줄 그었던 내용이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어디가 좋아서 그녀는 이처럼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언제나 여인의 눈에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비치고 있었다. 어떤 여인도 실제의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사나이, 각자가 생애를 통해 열렬히 바라고 있었던 뭔가 다른 사나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사랑했다. 이제껏 그를 만나 행복했던 여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는 가까워지고 인연을 맺고 또한 헤어졌을 뿐이며, 사랑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 - ‘바냐 아저씨’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인용’이라는 방식은 항상 어떤 ‘존중’을 내포한다. 우리가 체호프 단편을 많은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듯 그것이 타당하고 존귀하다면 반드시 어딘가에 인용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아야 비로소 인용할 가치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삶에도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 인용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겉치레가 아닌 내가 주인 된 단어와 문장을 적어야겠지. 어디서 들은 바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겪은 날들을 소중히 하면서. 오늘도 당신이 오롯한 나로부터 비롯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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