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김화랑의 생생 월드 쏙쏙

제 17회, 미술관

2022.04.22 | 조회 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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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신나는 주제다. 미술관에 가는 일을 좋아한다. 아마 취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전시도 열심히 방문하는 편이지만 특히 해외로 떠날 일이 생기면 항상 일정에 미술관 방문을 넣는다. 프랑스에 갔을 때는 일주일가량의 일정을 전부 미술관 투어로 채웠다. 마드리드에 체류할 땐 프라도미술관에 가고 또 갔다. 엘 그레코보다는 고야 때문이었다. 한 번 고야의 방에 머물고 난 뒤엔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야의 방으로 직행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고야의 개<The Dog>를 가장 좋아한다. 그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눈에 담은 그림인 것 같다. 오사카에 놀러갔을 때엔 미국 디트로이트 박물관 초대전을 보러가기도 하고 오사카 현대미술관에 가기도 했다. 오사카 현대미술관에 갔더니 난데없이 진시황 유물 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름 신선하긴 했다. 계획에도 없던 병마용을 구경하면서 어안이 벙벙하던 기억이 난다.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슈테델 미술관은 그곳에 머물면서 아마 열 번 정도는 갔을 것이다.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에선 남의 가이드 투어를 훔쳐 들으면서 다녔다. 뭉크를 보고 뒤샹에 관한 이야기를 몰래 들으면서 그의 작품을 구경했다. 헬싱키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 키아스마에도 그곳에 머무는 내내 방문했다. 키아스마는 소장 미술품들도 좋았지만 아트샵이 풍성했고(중요하다.) 미술작품들 보단 오히려 거대한 곡선을 곳곳에 품은 건물 자체가 더 매력적이었다.

안개 낀 에르미타주 미술관 앞 광장, 2017년 1월
안개 낀 에르미타주 미술관 앞 광장, 2017년 1월

  특히 좋았던 곳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에르미타주 방문은 나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의 마지막 대미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78,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일의 여정 끝에 마침내 나는 에르미타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89일을 꼬박 달려서 한 미술관에 도착한 것이다. 겨울 궁전이라 불리는 러시아 제국의 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에르미타주는 엄청난 미술품 보유고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最古)이자 세계 최대 미술관 중 하나다. 또한 에르미타주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는 마티스의 열렬한 후원자인 세르게이 슈츄킨이 러시아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마티스의 뮤즈였던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 때문이다. 마티스 주요 작품들의 예술적 원천이자 모델인 리디아는 러시아인으로 자신이 마티스에게서 받은 그림 대부분을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마티스를 좋아할 뿐이다. 숙소를 에르미타주 미술관 코앞에 잡은 (내가 머문 숙소의 현관과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입구 간 거리는 약 50m에 불과했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내내 어떤 관광지도 가지 않고 매일 미술관에 방문했다. 다른 곳에 간 일 이라곤 미술관이 닫은 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근처 미하일롭스키 공원을 산책하거나 마르스 광장을 스쳐 지나간 일 정도다.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안고 흐르는 네바 강변이나 네바 강변 위로 펼쳐진 트리니티 도개교에도 가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방문했지만 누군가 거기에 뭐가 있냐고 물으면 미술관 말고는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그저 미술관 관람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한 후 미술관에 들어가 폐관시간인 6시 즈음 미술관에서 나왔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으며 그것을 내내 반복했다. 앞서 말했듯 저녁이 되면 근처 넵스키 대로를 따라 마트에 가 필요한 식료품을 사오며 근처 공원 따위를 둘러보았을 뿐이다.

  해가 잘 드는 낮 시간엔 마티스를 보러 갔다. 마티스가 있는 신관은 구관에 이르기 전 우측 다른 건물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신관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면 (러시아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공공건물에 들어갈 때 공항에서 입국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짐을 엑스레이에 통과시켜야 한다. 기차역, 미술관 등) 나는 곧장 마티스의 작품이 있는 방으로 직행한다. <화가의 가족>이나 <대화>, <> 등의 작품이 있는 방 기다란 벤치에 앉아 조용히 그림들을 바라본다. <아내의 초상>도 좋다. 오후가 되면 마티스가 있는 신관에서 구관으로 이동한다. 에르미타주는 미술관이자 궁전이기도 하다. 모든 방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방들과 천장과 복도에 햇볕이 들어온다. 오후가 되면 나는 오래된 그림과 역사적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구관 궁전 복도를 기웃거린다. 와인 빛으로 붉게 칠해진 벽과 청록색, 금빛으로 번쩍이는 방들 너머로 1월의 나약한 햇빛이 점차 약해지고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무심코 바라본 창 너머로 차가운 질감의 안개가 낮게 깔려있다. 이른 저녁쯤 미술관 앞 커다란 궁전광장으로 나오면 그 안개 너머로 어둡고 낮은 조도의 주황색 불빛들이 어딘가 먼 곳처럼 빛나고 있다. 옷깃을 여미며 커다란 아치문을 통과해 넵스키 대로로 향한다. 얼어붙은 작은 석조다리를 건너 작은 광장과 공원들을 지나친다. 어두운 베이지 빛 석조건물에 반쯤 지하에 잠긴 레스토랑 창문 틈 사이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어떤 음악도 듣지 않고 소란스러운 거리의 소음을 들으며 걷는다. 오전 내내 바라본 마티스의 열대지방처럼 화려한 색채들은 머릿속에만 가득하다. 거리는 온통 칙칙한 주황색과 회색으로 가득하다.

A security guard at the Yeltsin Centre gallery in Yekaterinburg doodled eyes on a $1.4M Anna Leporskaya painting, according to museum reps.
A security guard at the Yeltsin Centre gallery in Yekaterinburg doodled eyes on a $1.4M Anna Leporskaya painting, according to museum reps.

  마침 러시아 미술관에 관한 재밌는 소식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지난 2022210일 뉴욕포스트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옐친 센터 미술관의 한 경비원이 그곳에서 소장중인 한 그림에 볼펜으로 낙서를 했다고 에이지(Age)신문을 인용해 보도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0세의 해당 경비원은 미술관 첫 출근 일에 업무가 지루한 나머지 작가 안나 레포르스카야의 전위 예술 작품 <Three Figures>(1932-1934)에 눈을 그려 넣는 낙서를 했다고 밝혔다. 옐친 센터의 큐레이터 안나 레셰트키나(Anna Reshetkina)그가 그런 짓을 한 동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행정부는 동기를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며 또한 그가 옐친 센터의 브랜드 펜(홍보용 볼펜)을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해당 경비원은 기물 파손 혐의로 해고되고 기소되었다고 에이지(Age)신문은 보도했다. 그림은 본래 모스크바에 위치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하던 작품으로 복원하는데 비용이 대략 4,600달러가 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낙서의 최초 발견자는 일반 관람객으로 지난 2021127일 저녁, 옐친 센터의 전시회를 찾은 두 명의 방문자가 그림의 훼손을 알아차리고 즉각 직원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옐친 센터 소장은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2주 후인 1220일에 관련 성명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약간 미심쩍은 부분은 옐친 센터 관내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측은 그림을 훼손한 사람의 얼굴이나 신원에 대해 전혀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과 외신에서는 그림을 훼손한 이가 경비원이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러시아 아트 뉴스페이퍼에서는 옐친 센터에서 범인에 관한 정보를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고 상반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어쨌든 재밌는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볼펜의 잉크가 그림 페인트 층에 약간 침투하긴 했지만 다행히 강한 압력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어가 많이 훼손되진 않았고 복원 가능할 것이라 밝혔다. 사실 난 눈처럼 그려진 낙서가 있는 쪽도 나름 귀여워 보인다. 작가는 조금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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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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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스타

    0
    almost 2 years 전

    이번주도 잘 보고 갑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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