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호의 시와 음악과 회고와 < 크리스마스 >

제 52회, 크리스마스

2022.12.24 | 조회 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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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음회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시와 음악과 회고와 < 크리스마스 >


🎧 김사월 - 엉엉


이런 이별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김선우 그렇게 되기로 정한 것처럼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선지의 비탈을 한 칸씩 짚고 오르듯 후후 숨을 불며 햇빛 달빛으로 욕조를 데워 부스러진 데를 씻긴 후 성탄 트리와 어린 양이 프린트된 다홍빛 담요에 당 신을 싸서 가만히 안고 잠들었다 깨어난 이라고 해야 겠다 1월이 시작되었으니 12월이 온다 2월의 유리불씨와 3월의 진홍꽃잎과 4월 유록의 두근거림과 5월의 찔레가시와 6월의 푸른 뱀과 7월 의 별과 꿀, 8월의 우주먼지와 9월의 청동거울과 억새 가 타는 10월의 무인도와 11월의 애틋한 죽 한 그릇 이 당신과 나에게 선물로 왔고 우리는 매달리다시피 함께 걸었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괜찮은 거야 마침내 당신과 내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12월 이 와서 ,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우리는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었다 첫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한 우리는 함께 무덤을 만들고 서랍 속의 부스러기들을 마저 털어 봉분을 다졌다 사랑의 무덤은 믿을 수 없이 따스하고 그 앞에 세운 가시나무 비목에선 금세 뿌리가 돋 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이미 가벼웠다 고마워, 안녕히. 틈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1월이 시작 되면 12월이 온다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10년 동안 나는 참 좋 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어제는 울었다. 벌써 12월 23일이나 된 것에 대한 허망함도 있었고, 기분도 안 좋고, 몸도 안 좋고, 방도 추운 것 같고, 늘어나는 일만큼 내가 줄어드는 것 같아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이 문장만 쓰고 잠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원래 오늘은 혼자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혈육이 본가에 온다고 해서 나도 오늘 가게 됐다. 얼마 전 독일에 다녀온 오빠가 와인을 사 왔는지 케이크와 고기와 와인을 사 간다며 다른 거 사지 말라고 한다. 엄마는 딸을 위해 석화를 사놨단다. 얼른 원고를 발행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가야지.

 

     사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여느 주말과 다를 바 없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낸 일이 잘 없다. 연인이 있었다면 좀 다를 순 있었겠지만, 이렇게 바쁜데 기념해야 할 연인까지 있었다면 스트레스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평일이었다면 느낌이 좀 달랐을까. 오늘처럼 출근은 안 해도 일은 했겠지만. 잠옷을 입고 일하는 건 참 편하니까.

 

     짬을 내 배송받은 커튼을 달았다. 생각보다 예쁘진 않다. 바깥에서 안이 보이는 게 싫어서 창문에 붙이는 필름도 붙였는데 삐뚤빼뚤 엉망진창이다. 빨래도 돌렸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양말을 보면서 어떤것처럼 아주 검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으로는 호박죽을 먹고 중간에 배고파 주먹밥을 데웠는데 반은 탔다. 김화랑은 후쿠오카에서 내가 추천한 구이집을 간다며 신나있는데 사진을 보니 이름만 같지 내가 알려준 데가 아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보내나 인스타그램을 켜 보니 맛있는 도넛을 먹고 있는 친구도 있고, 결혼식에 간 친구도 있다. 공휴일은 무조건 평일로 지정하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럼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때도 각자의 사람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집에서 전화가 온다. 몇 시쯤 오는지. 아직 일 안 끝났으니 먼저 먹으라 하고 끊었다. 이제 출발해도 8시는 넘어야 도착하겠지. 원고는 택시에서 쓸까 싶다.

 

     집에 오니 아빠랑 오빠랑 새언니가 파리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분명히 컵 사다달라고 했는데 안사왔다 그럴거면 왜 다녀옴?) 숫자 35가 쓰여있는 와인을 마시면서 이 와인을 사 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년 오늘 나는 제 집을 제공해 준 호스트 모니카와 친구가 되었고,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센강 앞에서 누군가의 음악을 들었고, 파리 3구에 있는 숙소 근처 빵집에서 통나무 모양 미니 케이크를 사다가 초를 불었다. 뭐에 홀린 듯 새벽이 가도록 영화를 봤고, 외로웠고, 몇 번 울었을거다.

Monica qui me manque
Monica qui me manque

     오빠는 파리에서 최악의 치안과 생각보다 별로였던 박물관, 추운 날씨 등 다시는 파리에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어쩔방구), 나는 시간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시금 그 나라에서 잠시간이라도 내일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오고 싶다. 생활과 여행의 경계를 다시 느끼고 싶다. 나는 지금 너무 생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기쁘게 빚을 내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눈이 반짝거리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눈떠 지하철을 갈아타고, 역에서부터 사무실까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15분 정도 걷는 아침이 오는 게 서서히 숨 막힌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 세계라도 좋다. 

 

      크리스마스인 내일은 미용실을 예약해뒀다. 머리를 하고, 옷도 사고, 사진도 찍다가 일찍 집으로 돌아가 보석 십자수를 하며 라프텔을 보다가 잠들 계획이다. 내년 크리스마스엔 휴가를 내고 어디든 다녀올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 Wildson - Carry A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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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eux Noë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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