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고실험] 에피소드는 지난주 예고드린 대로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의 션 베이커 감독님과 함께 했습니다. 남겨주신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구독자분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요. 이 글은 여러분 덕분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글은 <룩백>의 초반부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 지난 9월, 극장가에는 러닝타임이 1시간이 채 안되는 이상한 애니메이션 한 편이 개봉했습니다. 제목은 <룩백>.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회사 동료의 제안에 넘어가, 신사역의 작고 낡은 메가박스에서 남성 넷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1 <룩백>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주인공 후지노는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초등학생으로, 벌써 교지에 정기적으로 4컷만화를 실을 정도로 재능이 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후지노를 대단하게 여기고, 이대로 성장한다면 만화가의 길을 걷는 건 자명한 수순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지노는 등교를 거부하는 한 동급생이 자신과 같이 교지에 만화를 싣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2 등교를 거부하는 히키코모리 동급생의 이름은 쿄모토입니다. 그리고 만화적 설정에 따라 당연히 쿄모토는 천재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히키코모리가 나와 동등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을리가- 라며 무시하던 후지노는 처음으로 거대한 재능의 벽을 마주합니다. 따라잡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후지노가 성장하는 만큼 쿄모토의 실력도 성장해서 둘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습니다.
3 결국 후지노는 만화가의 꿈을 내려놓고 중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쿄모토의 졸업장을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좌절시킨 히키코모리의 얼굴이 궁금해진 후지노는 쿄모토의 집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는 방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습작노트들과 마주합니다.
4 왠지 모르게 심통도 나고 안쓰럽기도 한 마음에, 후지노는 노트를 찢어 쿄모토를 소재로 하는 4컷만화를 그립니다. 혼자 조용히 쿡쿡 웃고 있는데, 불어온 바람에 실수로 종이를 놓쳐버립니다. 종이는 쿄모토의 방문 틈새로 슝- 들어가버립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후지노가 황급히 도망치고 있을 때,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던 쿄모토는 종이에 그려진 4컷만화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방문을 열고 우다다다 맨발로 뛰쳐나가, 도망치는 후지노의 등에 대고 소리칩니다.
5 "후지노 선생님-" 이라고요.
6 쿄모토는 돌아선 후지노를 향해 새빨개진 얼굴로 말합니다. 당신의 엄청난 팬이라고, 당신의 만화를 보면서 배웠다고, 혹시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 예정이냐고. 후지노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로 대답합니다. 이제 4컷만화는 시시해졌다고, 지금은 공모전에 낼 장편을 준비 중이라고. 그리고는 동경 어린 눈망울로 쳐다보는 쿄모토를 둔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휘적휘적대는 발걸음으로 논길을 걷다가, 점차 보무가 당당해지더니, 마침내 껑충껑충 뛰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열렬한 팬이 기대하고 있는, 차기작을 그리기 위해서.
7 무언가를 창작해본 경험이 있다면, 또 자신의 재능을 의심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위의 장면에서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제가 눈물을 흘린 건 단지 후지노의 변화하는 발걸음에 감동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후지노에게 그 말을 전하기 위해, 가진 바 모든 용기를 쥐어짜냈을 쿄모토의 마음 또한 전해져왔기 때문입니다.
8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연히 내게 큰 영향을 끼친 작가와 마주치더라도, 막상 다가가 당신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미 저 사람은 나 같은 팬을 수도 없이 만났을 테니까.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들었을 테니까. 이미 자기 자신도 알고 있을 테니까. 바빠보이는데 시간을 뺏으면 안 되니까. 귀찮게 여길지도 모르니까...
9 저 역시 그렇게 마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고 흘려버리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집에 돌아가면 찝찝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종국에는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한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좋아한 건 아니었다는' 핑계를 만들어냅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더 좋아하는 작가였다면 나는 분명 용기를 냈을 거야, 라는 자기합리화를 해버리고 말죠. (저의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10 <룩백>을 보고 나오면서, 앞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보면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니 멈추지 말아달라고. 생각해보면 쿄모토의 고백으로 인해 삶이 바뀐 건 후지노만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자신의 동료가 되어달라고 제안합니다. 얼굴도 모른 채 같은 지면을 나누어 경쟁하던 두 사람은 함께 만화를 그리며 성장해 나갑니다, 서로 등을 마주한 채로.
11 션 베이커 감독님께 드렸던 마지막 고백은 인터뷰 전에 미리 연습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막상 감독님의 얼굴을 마주하니 말을 꺼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인터뷰는 제한시간 20분에 다다르고 있었고, 함께 미팅룸에 있던 유럽의 PR 에이전시 분들은 이번 질문이 끝나면 더 이상의 질문은 불가하다고 채팅을 남겼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이 꺾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션 감독님이 "Don't wait."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12 그리고 결말은, 여러분이 영상에서 보신 대로입니다.
13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보세요. 그 말은 어쩌면 당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만든 작가를, 가수를, 배우를, 셰프를, 감독을 커리어의 끝에서 살려내는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말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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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우유
아직 영상도 보기 전인데 글을 읽다 별안간 눈물을 흘려버렸네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말할 용기를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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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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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
성운 피디님 정말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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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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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yu0729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마침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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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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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lla
진심을 전하는 재능이 뛰어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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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e_redpanda
성운님,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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