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하여

그리고 2024년 회고

2025.01.03 | 조회 2.6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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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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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의 사고실험

계속 질문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11월의 어느 날, 자정이 넘은 시각. 3호선 지하철에서 벌어진 일이다.

두 명의 중년 남성이 다투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나이에 체구가 작은 쪽을 A, 40대로 보이는 나이에 체구가 큰 쪽을 B라고 하자. 불콰해진 얼굴을 보니 주취자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둘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주던 승객들은 다시 익숙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옆 칸으로 옮길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움직였다. 그녀는 둘을 달래는 동시에 지하철 경찰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제보하기 시작했다. 그 침착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A와 B에게 다가갔지만 다툼에 개입할 타이밍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용기는 언제나 생각보다 한 끗을 더 필요로 했다.

환승 교대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았다. 내릴까 말까. 이대로 내리고 나서 진짜 싸움이 벌어지면 다른 사람들이 말려줄까. 주위를 둘러봤을 때는 가능성이 적어보였다. 내가 내리면 이 여성만 남는다. 하지만 이번 환승을 놓치면 할증택시를 타야 될 수도 있다. 이 아저씨들에게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그 순간 A가 폭발했다. 갑자기 양팔을 휘두르며 B에게 달려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가!'

나도 모르게 A를 뒤에서 붙잡았다. 때마침 교대역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렸다. 에라 모르겠다. A를 껴안은 채 열차 밖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그의 몸은 예상보다도 더 가벼웠다. 승강장에 발을 디디면서 꽤 괜찮은 해결책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B가 닫히는 열차 문을 비집고 뛰쳐나오기 전까지는.

B의 뒤에서 스크린도어가 닫혔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이 정도면 같은 칸에 탄 타인의 의무는 충분히 다했잖아요.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요. 일단 둘을 떼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A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B의 어조가 아까와 딴판으로 차분해져 있었다. '형님, 우리 얘기 좀 합시다. 오해를 풀고 싶어서 그래요. 저는 형님이 먼저 손을 들길래 막으려고 한 것뿐이에요.'

한편 A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 불안정해보였다. 그는 공중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이 포병대대에 있어. 니가 뭘 알어.’

나는 둘의 조각난 대화를 들으며 사건의 전말을 짜맞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원래 서로 모르는 사이다. A가 지하철에서 소리를 켠 채 극우 성향의 유튜브를 보고 있다.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B가 A의 옆자리로 가서 한 소리를 한다. 점점 양쪽의 언성이 높아진다...

A는 계속 허공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분노가 B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보았다. 의무경찰 시절, 건설노조 노숙현장을 지키던 밤이 떠올랐다. 경비를 서고 있는 내게 노동자 한 명이 막걸리를 든 채 다가온다. 다짜고짜 나를 껴안는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시큼한 냄새가 풍긴다. '미안하다 아들아.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그때 나는 그가 멀리 있는 자신의 아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느꼈었다. 

잠시 동안 A를 끌어안아도 될지 고민했다. 하지만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아들을 위협하는 허공의 적과 싸우는 A와, A의 어깨를 붙잡고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B와, 말없이 A의 마디진 손을 쓸어내리는 나. 우리 셋은 기묘한 방식으로 연결된 생명체 같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A를 타이르던 B도 지친 듯했다. '형님, 이제 그만합시다. 우리 때문에 막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되겠습니까. 집에 보내줍시다. 우리 막내를... 응원해줍시다.‘ 예상치 못했던 응원이라는 단어가 귀에 와서 콱 박혔다.

그러자 A는 고개를 돌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쩌면 내 얼굴 너머에 있는 막내의 얼굴을.

‘우리, 유튜브에 올라갈 거야. 아까 다 찍혔어.‘ 갑자기 A가 힘없는 어조로 칭얼거렸다. B와 나는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은 못 봤다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A를 달랬지만 그는 우리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A는 자신의 얼굴이 유튜브에 올라갈까 봐 걱정했다.

B는 나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고마워서 꼭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연신 사양하는 나에게 그럼 자기 번호를 줄 테니, 연락을 하는 건 내 자유라며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는 한번 더 나를 응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50대, 40대, 30대 삼형제의 동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B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둘을 다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대신 열심히 유튜브를 봤다. 열차 안에서 춤을 추고, 공중제비를 돌고, 단소로 사람을 위협하는 빌런들이 등장했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해보고 싶어도 댓글창을 보면 웃음이 터졌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난동 부리는 취객을 포옹해서 달래는 청년을 보면서 눈물을 찔끔했고, 그때 용기를 내서 A를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피드는 끝없이 이어졌다. 가끔은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가 금방 잊혀진다는 사실에 압도되기도 했다. 아직까지 우리 세 사람의 모습이 찍힌 영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도파민의 홍수 속에서, 싸움조차 되지 못한 어설픈 다툼은 존재하지 않았던 듯 씻겨 내려갔다. 오직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A의 얼굴과 응원한다고 힘주어 말하던 B의 얼굴이 마음속에 남았다.


0  한 해를 회고하는 순간에 왜 하필이면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왜 굳이 이 글이 쓰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다 쓰고 나니 너무 길어서 지울까 생각도 했는데요. 여기가 아니면 저랑 아저씨 두 명이 등장하는 밍밍한 에피소드를 또 어디다 쓸 수 있겠습니까. 그냥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1  2024년은 개인적으로는 제법 근사한 해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있게 일했고, 생산성도 가장 높았고, 제 이름과 얼굴을 아는 분들도 훨씬 늘었습니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일들도 여럿 했습니다. 뉴스레터를 시작했고, 외부 매체에 인터뷰가 실리는 경험도 했고, 한국에서 가장 큰 창업경진대회 무대에 사회자로 서기도 했습니다.

2  무엇보다 채널 독립을 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이라는 걸 약간이나마 획득한 해였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영상 하나하나의 성과에 자주 일희일비하는 편이었는데요. 조금씩 늘어나는 구독자 수를 보며, 드디어 손 틈새로 새어나가지 않는 무언가가 쌓이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3  그리고 12월이 왔습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온통 농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력감 때문에 며칠 동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주에는 영상을 발행하지 않았습니다.

4  역설적으로, 그 시간 동안 저는 제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좋은 어른들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좋은 어른들이 있고, 그래서 시청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긍정할 때 동시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그게 진실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걸, 정작 콘텐츠는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깨달았습니다. 

5  흔들리던 저를 붙잡은 건, 계엄 사태 4일 뒤에 발표된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강연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를 쓰기 전에 두 가지 질문을 노트 앞에 써두었다고 했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허나 자료를 읽을수록 그 질문들이 불가능해보여서 체념하고 싶었다고 그녀는 썼습니다. 그러다 광주에서 살해된 젊은 야학교사, 박용준의 기록을 읽으면서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는 사실을 벼락처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6  그 순간 작가님이 받았을 충격은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한강 작가님조차 올바른 질문을 찾아서 수년을 헤맸다면,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도착하기까지 다시 수년이 걸린다면, 나에게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지 않을까. 어쩌면 평생을 사용해서 단 하나의 질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7  새해에는 부디 납작해지지 않기를. 처음 듣는 이야기에 경탄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나의 세계를 침범하는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기를. 유튜브가 결코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세상을 구하는 건 콘텐츠가 아니라, 겨울밤에 두려움을 뚫고 여의도로 달려간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옆에 있기 위해 무안으로 달려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8  그리고 그들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역시 한번쯤 낯선 타인을 도운 적이 있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loud.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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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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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젣의 프로필 이미지

    제젣

    1
    7 days 전

    정말 잘봤습니다. 덕분에 혼자 있는 작업실에서 가슴이 따뜻해졌어요. 다들 올 한해도 열심히 잘 살아내셨고 다음 해도 어제보다 더 나은 나의 모습으로 한발 한발 나아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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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든의 프로필 이미지

    유가든

    1
    6 days 전

    평소 인터넷을 사용하며 그 어떤 매체에도 댓글을 달지 않는 편입니다. 심장을 흔드는 글이네요. 열심히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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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선의 프로필 이미지

    혜선

    1
    6 days 전

    성운님의 글은 항상 좋아요. 유튜브 영상도 항상 좋습니다. 성운님의 진심과 고뇌, 공감이 켜켜이 담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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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arlb3의 프로필 이미지

    pearlb3

    1
    5 days 전

    해외에서 12월 한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목격하면서 '역시 한국'이라 생각했어요. 한강 작가님의 글을 빌리자면 '인생은 잔인하지만 또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인생은 다방면의 얼굴이 있는거 같아요. 그 안에서 아름다운 면들을 잘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친구가 그러더군요. 길에서 누군가 쓰러졌을 때, 주윗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도와주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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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수의 프로필 이미지

    수수

    0
    4 days 전

    안녕하세요. 선물 같은 성운님의 메일을 기다리는 구독자입니다 :) 이번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문득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잘 보내주고, 새해를 잘 안아주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납작하지 않은 한 해 같이 보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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