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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요 근래까지 일과 학교를 병행하며 도달한 생각은,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대부분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고민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창의적 사고, 사고력, 기획력 같은 말들도 결국 한 사람이 하나의 상황과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정해진 답을 더 빨리 찾는 능력보다, 정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생각을 구성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죠.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새로운 기획을 보고하고,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과정은 사실 하나의 정답을 제출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사고의 과정을 상대방이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일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이 세 문장이 납득되는 과정이 비즈니스에서의 문제 해결이고,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설득의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2/
이런 고민을 지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라는 말의 의미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공부해왔습니다. 문제가 있고,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맞히기 위해 개념을 외우고 문제를 반복해서 풀었습니다. 물론 그 방식이 전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 역시 그렇게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답이 정해진 문제는 AI가 빠르게 풀어주기도 합니다. 공식이 있고, 조건이 명확하고, 답이 하나로 수렴되는 문제일수록 AI는 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다양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내 생각이 상대방에게 납득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점과 판단을 설득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들에게 공부는 왜 필요한 걸까요. 공부란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공부를 통해 "안다"라는 상태에 이르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책'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책을 많이 읽던 사람은 아닙니다. 텍스트만으로 전달되는 형태보다 시각, 청각, 움직임 같은 다양한 인지적 요소가 함께 있을 때 더 잘 이해된다고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영상이나 강의, 도표가 텍스트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나서도 대부분 기억에 남기 어렵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분명 읽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많은 내용이 흐려집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 "그래서 내가 뭘 읽은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장과 대학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사고의 과정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어느 순간, 책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담아둔 묶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고 과정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형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4/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사고 과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저명한 학자나 기업가, 연구자들이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 그 책의 결론에 도달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문제를 보았고, 어디서 막혔고, 어떤 개념을 가져왔고,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밀고 갔는지. 그 사고의 궤적이 궁금해졌습니다.
AI가 만들어주는 정보에 조금 지친 것도 있습니다. AI의 답변은 빠르고 깔끔합니다. 요약도 잘하고, 문장도 매끄럽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정리되어 있어서 오히려 피로합니다. 사람이 어떤 문제 앞에서 망설이고, 돌아가고, 다시 붙잡는 과정이 사라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사람의 로우한 텍스트가 덜 피로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많은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AI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출판되는 책이라면 적어도 저자와 편집자가 그 사고의 과정을 검토하고 통과시켰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5/
책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면서, '요약된 정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긴 정보 앞에서 "그래서 세 줄 요약 좀"이라는 농담 아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 줄 요약 속 세 문장과, 수많은 문장이 쓰여 있는 책 속의 어느 세 문장은 결국 같은 양의 텍스트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니, 책을 읽으면 수많은 세 줄 요약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연속적으로 읽는 셈이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많은 정보를 깊게 접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원하는 답을 바로 꺼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 사람의 사고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라갈 수 있고,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에 연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상치 못한 정보를 접하기도 합니다.
6/
참고로 책을 읽고 기억에 남기 어려운 상황은 여전히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꼭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이해하지만, 인지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읽은 모든 문장을 머릿속에 보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독서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읽으며 실행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감명 깊었던 문장에 하이라이트를 합니다. 도움이 되었던 페이지에 메모를 남깁니다. 나중에 필요할 것 같은 내용이 있으면 페이지를 접어둡니다.
어쩌면 이 정도가 제가 지금 생각하는 "책을 읽는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제 생각에 필요한 문장들. 그리고 나중에 제가 문제를 마주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장들을 찾기 위한 표시를 남기는 것.
이렇게 하니 조금 더 기억에 남고, 나중에 다시 찾아서 활용할 때도 도움이 됩니다.
7/
생각이 살짝 다른 곳으로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책에 대한 생각은 다시 공부와 앎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공부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는 일은 AI가 더 잘할 텐데, 우리는 왜 계속 공부해야 할까요.
저는 공부를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공부란 새로운 정보를 전달받는 일이 아니라, 그 정보를 나의 생활, 문제, 관점에 적용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상태까지만이 아니라, 그 개념으로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설명은 정보에 가깝고, 해결은 적용에 가깝습니다. 정보를 찾고 이해하는 것은 AI가 쉽게 도와주는 시대에, 이 차이가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8/
어쩌면 이 생각에는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던 제 경험이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뽑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인사이트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분석이 회사의 문제에 적용되고, 실제 실행으로 이어졌을 때 비로소 인사이트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 강의에서 들은 개념, AI가 정리해준 정보가 그 자체로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내 실생활이나 문제 해결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공부하는 공학, 디자인, 경영, 경제 같은 분야들도 단순한 과목이 아닙니다. 그 분야들의 개념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관점을 배우는 일입니다. 공학은 공학의 방식으로, 디자인은 디자인의 방식으로, 경영은 경영의 방식으로, 경제는 경제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문제를 다룹니다.
공부란 결국 관점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그 관점으로 내 앞의 문제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9/
따라서 앞으로 교육이나 강의의 역할이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 머문다면, 결국 사람들은 "AI에게 물어보고 말지"로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교육을 받고,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 조금 달라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문제 해결 사고를 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소통하고 실험해보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지식은 전달될 때보다 적용될 때 더 강해집니다.
그리고 공부는 그 적용의 가능성을 넓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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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래서 요즘 제 아이폰 스크린타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내 밀리의 서재 이용 시간이 인스타그램보다 많은지 보는 겁니다. 물론 종이책을 읽는 시간은 기록되지 않으니 완벽한 지표는 아닙니다. 그래도 제 주의력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은 장치가 됩니다.
조금 웃기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꽤 현실적인 공부의 지표입니다.
그 정보가 내 생활을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들었는지. 내가 마주한 문제를 조금 더 잘게 쪼개게 만들었는지. 누군가를 납득시키는 사고의 과정으로 이어졌는지.
저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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