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13-14)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며 그 기쁨을 누려가는 과정에서 흔히 겪는 단계가 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달리 연약하고 어두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단계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 연약함과 어두움을 자연스레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여기서 그러한 자신을 미워하거나, 연약함과 어두움을 없애려 안간힘 쓰는 경우가 생긴다.
연약하고 어두운 자신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 연약함과 어두움이 커지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먹이를 공급받는 맹수처럼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먹고 쑥쑥 자란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었던 기쁨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로 이어진다. 틀림없이 악이 행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연약함, 어두움을 분리시켜서 문제를 해결하듯이 접근해도 좌절을 마주하게 된다. 조금씩 개선되는 것 같아보여도, 더 깊은 곳에 있는 악을 대면하게 된다. 시도해도 더 이상 극복할 수 없고 오히려 더 악화되는 듯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면 좌절하고 지치고 분노한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역시 온데간데 없고, 자신만 남게된다. 그리고 지쳐버린채로 포기하게 된다.
나 또한 두 가지 모두 겪었다.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스스로의 타락한 마음과 행위를 발견한적이 있었다. 스스로 비교적 선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던 때여서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향한 증오감이 걷잡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할만큼의 악으로 느껴졌다.
그 다음엔 꽤나 분석적으로 내 삶의 문제들을 제거하려고 하기도 했다. 내면의 문제에 대해 상담을 받기도 하고, 사람 심리와 정신을 공부하며 나를 파악하고 더 낫게 하려고 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의 모습에 많은 희망을 품고 우쭐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렇지 못한 이들이 답답해보였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동시에 나의 교만함과 판단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럴 때면 그럴때면 다른 이들에게 더 나아질 것을 종용했다. 진심이었지만, 유익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잔소리가 되고 자유를 빼앗았다. 지금도 이 과정 속에 있다. 분명 더 나은 것을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호소하지만, 유익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단 하나 내가 아직도 충분히 맛보지 못하고 알아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양심을 선하게 하는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섬기게 하시는 이도 예수 그리스도임을 늘 잊고 나의 방식을 적용한다. 내가 판단하는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솔직히 지친다. 솔직히 답답하고 무력하다. 스스로 짐을 지우고 있다.
때때로 예수님께서 내 짐을 가볍게 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다. 그리고 다시 문제를 해결하러 간다. 예수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지기를 소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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