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1:39-40)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불린다.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세세히 언급된다. 아벨부터 라합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얘기하려다가 너무 많기에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로 마무리로 접어든다.
11장은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고, 그러나 그것은 받지 못함이 아닌, 그들이 돌아갈 하나님 곁에서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이 예비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말로 그렇다.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그들이 믿은 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 아브라함도 별처럼 수많은 그의 후손들을 보지 못했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시는 증거에 따라 행동에 나섰다. 실제로 그들은 그 증거들이 한 조각씩 맞춰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버텨나갔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은 기구하고 어렵고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들이 하나씩 쌓이고 하나님과 친밀해질수록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 땅에서 그들이 받을 유익이 아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축복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시길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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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래왔지만, 요즘엔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관계 안에서 마음이 끌리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었다. 물론 그들을 다 아끼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만, 당연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마음이 가는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분류해보고 왜 다른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차이는 그것이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지였다 (너무 당연한 얘기). 그 중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에 따라 마음의 거리가 달라졌다.
나의 외부적 조건이나 심지어 내면의 성품도 아닌, 나의 존재 자체와 소통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날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저절로 이끌렸다. 그들은 내게 각별하다.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나와 상관이 있다.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알고, 그 존재를 얼마나 신뢰하냐에 따라 내가 친밀감을 느끼는 정도도 달라졌다. 보낸 시간, 정보, 성격의 유사성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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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친밀감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시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분을 얼마나 신뢰하는 지에 따라 유난히 각별하게 느끼실 것 같다. 모두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조들을 유난히 기뻐하셨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각별하기 때문이셨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지각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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