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유식을 즐겨 먹어요!❞ - 김○○ (2N세)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어떤 생각이 들까요? 처음에는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성인이 이유식을 즐겨 먹는다는 것이 분명히 이상하고 낯선 일이니까요.
얼핏 농담 같지만, 신앙의 자리에 이 비유를 가져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이었읍니다.
여러분은 그 때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것을 소화할 힘이 없읍니다.고린도전서 3장 1-2절(공동번역)
성경은 신앙의 성숙을 단단한 음식에 비유합니다(히 5:14).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제 자신 역시 이유식 신앙에 머물고 싶을 때가, 그리고 그럴 때가 참 많습니다. 부드럽고 삼키기 좋은 말씀만을 넙죽넙죽, 남이 떠먹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요.
바울은 성경의 사건들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를 일깨우기 위한 본보기라고 말합니다(고전 10:11). 이상적인 인물들의 모범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보기들도 더러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고도 끊임없이 다시 등을 돌렸던 이스라엘의 역사, 편지를 받고도 여전히 미숙했던 초대교회의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사실 제게는 '초대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인 그림이 있었습니다. 소위 '신앙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도전도 쉽게 접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초대교회 역시 늘 바울에게 권면과 꾸지람을 받아야 했던 공동체였습니다. 분열되고, 잘못된 가르침에 휘둘리고, 미숙합니다. 오늘 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교부들에 대해서 큰 기대가 없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몸담고 계셨던 히브리적 흔적이 퇴색되고, 헬라적 구조의 문을 연 사람들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순하고 편협한, 무례하기까지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좁디 좁은 제 선입견을 단단히 깨준 책, 《교부와 만나다》!
오늘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선택했던 교부들의 기록을 살펴보려 합니다.

'교부(敎父, Church Fathers)'는 문자 그대로는 '가르침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교부는 가르침에서 모범이 되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부학'을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흔히 교부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대략 1세기 말, 곧 사도들의 세대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부터 8세기경까지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죽음을 맞았고, 요한도 그의 말년에 밧모섬에 유배되면서 1세대 사도들이 순교하거나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사라지고, 남은 교회는 이제 스스로 신앙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아직 정경 조차 자리 잡지 않았던 혼돈의 시기,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붙들고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맞이한 첫 번째 큰 적은 다름 아닌 거대한 제국 로마였습니다. 로마 사회는 본질적으로 다신교적이었고, 황제 숭배를 제국 질서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각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가정마다 가신(家神)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황제 숭배였습니다. 황제는 단순한 정치적 통치자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황제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곧 제국의 안정을 지탱하는 근간이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는 교회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단순히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은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황제에게 무릎 꿇지 않는 교회가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읽혔습니다.
특히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 황제는 불의 원인에 대한 의혹을 돌리기 위해 교회를 희생양 삼았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극심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부의 압력만큼이나 힘겨웠던 도전은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영지주의, 마르키온 등과 같은 사상은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이단들은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왜곡될 위기 앞에서 교회는 박해를 견뎌내는 것 이상으로 신앙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자신들의 믿음이 참된 길인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호교론자(Apologists)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외부의 비난과 내부의 이단을 모두 상대했습니다. 복음을 철학적 언어로 설명해 사회적 오해를 풀어내며, 이단의 사상을 반박했고, 교회 내부로는 신앙의 정체성을 명확히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호교론자는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100~165경)입니다.
그는 본래 철학을 탐구하던 인물이었으나, 복음을 접한 후 로마에 신학교를 세우고 글을 남겼습니다.
특별히 그의 저작 중 『제1변증서』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헌정된 변증문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제1변증서』에서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대적하는 반체제 세력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성찬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성례”라고 증언했습니다(Apologia I, 66–67).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성찬 전례의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가 바로 그의 글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유스티누스의 또 다른 저술 『트리폰과의 대화』는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논쟁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방대한 분량에 비해 구성이 치밀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지만, 예형론(typology)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유스티누스는 구약의 계명과 사건들이 모두 신약의 예형임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완성하신 분임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 곧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이어가는 길임을 밝히려 했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 호교론자는 리옹의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0경)입니다.
그는 177년 순교한 포티누스를 이어 리옹의 주교가 되었고, 특히 영지주의와의 논쟁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주요 저작은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 “거짓된 영지의 실체를 벗기고 반박함”)입니다.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영지(gnosis)'라는 단어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체계를 정당화하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지식을 가진 자라 자칭하나,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한다.❞
(Adversus Haereses I, Preface.2).
이레네우스에게 참된 영지는 단순한 지적 앎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적 전승 속에서 교회가 간직한 복음의 지식이었습니다. 이레네우스에게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말한 바와 같이 영지란 '복음에 대한 이해력'이었던 듯합니다. 그는 진정한 영지는 교회의 신앙 고백 안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라는 말은 헬라어 γνῶσις (gnōsis) 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그노시스 는 단순히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추상적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70인역 성경을 보면, 히브리어 ידע (yada), ‘알다’라는 동사를 옮길 때 자주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노시스(영지) 였습니다.
야다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체험과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창 4:1)라는 구절에서처럼, 깊은 인격적 만남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다”(렘 31:34)라고 했을 때도, 하나님을 교리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약도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지는 머리로만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앎이었습니다. 이런 뉘앙스는 초대교회의 가장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인 『디다케』(Didache,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0~130년 사이에 피상적으로만 신앙에 귀의했던 지식인들이 교회에 몰려들었는데
영지주의 체계는 바로 이들의 교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들은 유스티누스처럼 사도 전통과 교회 전통의 입장에서 신앙을 받아들이는 대신,
신앙을 자기들 철학과 체계에 맞추어서 유리한 대로 써먹었다.《교부와 만나다》, 아달베르 함만
결국 영지주의가 교회를 위협한 본질은, 말씀을 깊이 알지 못하고 표면적으로만 아는 태도였습니다.
이레네우스의 글은 단순한 논박이 아니라, 피상적 앎을 넘어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도록 초대하는 신앙의 권면이었습니다.

피상적 영지에 머물러 신앙을 왜곡했던 영지주의와 달리,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 참된 영지를 모색한 흐름 또한 존재했습니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철학과 종교, 과학과 신비주의가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지식의 세계였습니다. 그속에서 기독교 역시 자연스럽게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첫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은 판타이누스(Pantaenus)입니다. 그는 원래 스토아 철학자였다고 전해지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교리학교를 열었습니다. 판타이누스가 강조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지혜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절제하며 덕을 쌓고, 율법의 정신을 배우며 살아내야만 참된 지혜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제자가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입니다. 클레멘스는 사제직을 맡은 적은 없었지만, 유스티누스처럼 교회 한가운데서 신앙을 지켜낸 평신도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철학을 이교도의 사상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학을 하나님이 주신 준비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듯, 헬라 세계에는 철학이 예비적 역할을 했다고 본 것이지요. 당시에는 논란이 많았지만, 이런 시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열린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리게네스(Origen, c. 185–253)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고대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교부로,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분명한 틀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을 것인가-
오리게네스는 이 문제에 대해 뚜렷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성경 해석의 기초이자 버팀목으로 보았습니다. 본문이 없으면 해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본문 안에는 언제나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곧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영적 의미입니다.
오리게네스는 구약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옛 역사”로 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약 전체를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출애굽 사건은 문자적으로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세례의 모형이며, 신앙인의 삶 속에서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례, 광야에서의 방황은 신앙의 여정, 만나와 메추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을 상징한다고 풀었습니다.

그대 또한 구약성서의 모든 표지를 찾아서
신약성서의 어떤 사실에 대한 예형인지를 자문해 보라.오리게네스, 『마태복음 주해』 12권 3절
(Commentarium in Matthaeum XII,3)
오리겐은 성경 안에 여러 층위가 있듯, ‘사막을 건너가는 듯한’ 괴로운 인생이 끊임없이 거룩한 변모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세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그리고 일치의 단계입니다. 오리겐은 인간이 정화되고 조명되어서,
혼인, 곧 일치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고도 점진적인 상승의 여정으로서
인간은 이 여정으로 나아갈 책임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교육이다.

오리게네스가 문자 너머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초대 교회의 뿌리 깊은 문헌 전통이 있었습니다.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신약성경과 거의 같은 시기, 혹은 직후에 기록된 교부들의 문헌들이 있습니다. 『디다케』, 『바르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솔로몬의 송가』 같은 초기 저술들은 모두 히브리적 토양에서 자라난 기독교의 문헌입니다. 히브리 성경을 믿는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서의 신앙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남쪽 길이 있습니다.
남쪽 길에는 유대교가 깊이 뿌리내린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교회들은 자연스럽게 회당의 조직과 예배 양식을 본떠 성장했습니다.
유대교의 시편과 기도문, 율법 낭독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이어졌고, 그 위로 성찬과 세례가 덧붙여졌습니다. 모두 유대교적 배경에 기반을 둡니다. 성찬은 안식일 만찬의 전통에서 시작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식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세례 역시 율법에 규정된 정결례 전통 위에 새롭게 세워진 것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문헌이 바로 『디다케』입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부제를 가진 디다케는 신약성경과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리 논문이라기보다, 교회 생활 지침서에 가까운 디다케는 회당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세례와 금식일, 성찬례 규범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디다케의 기도문은 시편을 빼닮았고, 공동체의 모임은 유대인의 안식일 회집 구조를 따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한 모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메시아적 신앙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적 경향이 강한 남쪽 길의 반대편에는 북쪽 길이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해 소아시아와 헬라 세계를 거쳐 로마로 이어지는 북쪽 길에는 바울의 선교로 이방인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은 헬라어로 표현되고 헬레니즘 사상의 언어를 빌려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편지와 저술은 교회와 교회를, 목자와 신자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했습니다.
두 길은 결국 로마에서 만났습니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이 교차한 지점이자, 유대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본격적으로 함께 신앙을 형성한 자리였습니다. 이 접점에서 교회는 신앙을 기록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 교회 전통으로 추정되는 『디다케』가 남쪽 길을 넘어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고, 기독교 세계의 접점인 로마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질수록 단순한 신앙 고백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다양한 지역 교회들을 하나로 묶고, 거짓 교사들과 이단으로부터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질서와 목회적 권면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필요로 등장한 것이 사목 서간들입니다.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와 같이 교회의 내적 질서와 직분을 정리한 글들이 있는 한편, 순교를 앞둔 지도자들의 편지도 사목 서간에 포함됩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초대교회 문헌 가운데 가장 강렬한 목소리를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2세기 초,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를 앞두고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서간들은 단순한 교리 논문이 아니라, 죽음을 눈앞에 둔 신앙인의 마지막 고백이자 공동체에 남긴 신학적 유산입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은 놀라울 정도로 성경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편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순교가 단순히 로마의 박해에 희생된 사건이나 대의적인 결단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자리로 이해한 듯합니다.
그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말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를 떠올리게 합니다. 곡식이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갈려 고운 가루가 되어야 했습니다(레 2:1). 이는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험한 길이 갈리고 갈려 고운 평지가 되는 것(사 40:4)의 구조와 같습니다. 육신의 생각, 사람의 계명은 모두 깎이고 부서지는 것, 성경의 낮아짐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운 가루가 되는 과정, 곧 자기부인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출산의 고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갈 4:19)고 말했듯, 그는 자기 순교를 스스로 참된 제자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제자들을 낳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자기 부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같이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교부들의 글은 비록 헬라 철학의 무대에서 기록되었으나, 그 속에 담긴 많은 내용이 여전히 히브리 성경의 사고와 상징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헬라적 언어를 빌렸을 뿐, 전달하고자 한 것은 철학적 지식이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교부들이 전한 핵심은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 장성한 분량에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장 34절
교부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옷을 입혀 복음을 해석했고, 결국 표면적인 해석과 도덕적인 교훈만을 남긴 인물들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인용하거나 예화로 사용하는 교부들의 말도 대부분 극적인 순교담이나 윤리적 권면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별의 문제는 아니었을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교부들의 문헌 속을 깊이 따라가 보면, 교부들은 문자적·도덕적 해석에 머물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끊임없이 성경이 가리키는 영적 성숙, 곧 “장성한 분량”(엡 4:13)에 이르도록 교회를 권면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문헌들이 보여주듯, 교회의 신앙은 철저히 유대적 토양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회당 예배와 기도문, 율법의 낭독과 정결례는 성찬과 세례라는 새로운 기념 속으로 옮겨졌습니다. 교부들은 이러한 히브리적 언어와 구조를 여전히 간직한 채, 헬라 세계의 철학적 표현을 통해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글에는 표면적으로는 헬라적 형식이 보일지라도, 그 깊은 층위에서는 성경적 상징과 영적 구조가 남아 있습니다.
이레네우스가 구분한 참된 영지, 오리게네스가 문자 너머에서 발견한 영적 의미, 이그나티우스가 남긴 자기부인의 언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 쓰였지만, 모두 같은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교부들의 저술은 단순한 교리 논박이나 윤리적 교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영적 성숙, 곧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려는 과정 속에서 나온 목소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부 문헌을 새롭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부들의 피가 서린 기록을 단순히 표면적 해석이나 도덕적 감동으로만 소비하는 것은 그들의 글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 문헌들은 정통 신앙을 지켜내고 후대에 전하려는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자, 성숙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성장하려 했던 흔적입니다. 교부 문헌은 결국 우리에게, 겉으로 드러난 의미를 넘어 말씀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라는 초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글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유식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단단한 음식을 향해 걸음을 옮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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