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해 보기 위함은 아닌 듯합니다.
처음 읽고팟다를 시작한 후로 어쩌다보니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들을 이어왔는데요.
“특정 시대별로 왜 어떤 관점이 주류가 되고, 어떤 관점은 침묵 속으로 사라졌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치열했던 중세, 교회는 수많은 선택 앞에 놓였습니다. 외부의 지적 도전에 맞서고, 내부의 통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가 만든 선택들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깨닫는 방식의 큰 기준이 되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3세기 초대교회는 두 가지 위협 앞에서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이단적인 신흥종교로 의심했고, 우리가 잘 알다싶이 극심한 핍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누가 참된 기독교인지, 무엇이 '정통' 신앙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리우스주의, 도세티즘, 영지주의 등 다양한 해석이 교회 안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의 교부들은 이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헬라 철학의 언어로 기독교 신앙을 '재표현'한다.❞
요한복음의 말씀(로고스)를 헬라 철학의 로고스 개념과 연결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틀로 설명한 것입니다.
일종의 '번역'이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이 전략은 어쩌면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 같습니다. 이단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교회의 신앙을 명확히 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개념'이 정통으로 절대화되면서, 다양했던 초대 교회의 경험과 표현이 점차 좁혀졌습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단순히 종교 정책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제국의 중심부로 편입된 결정적 전환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당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황제가 자주 교체되고, 제국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교회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도시와 농촌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주교는 지역의 지도자에서 제국 전체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인물로 확대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교회의 성장의 힘을 정치적 통일의 도구로 활용합니다. 325년 니케아에서 소집된 최초의 공의회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가'을 정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채택된 신조, 니케아 신경은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성공합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교회는 정통 신앙을 확립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로운 긴장이 연속되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정통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반복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해야 했고, 그때마다 저편 아래에 흐르던 분열은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집트와 시리아 교회(동방정교회,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제도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를 위해 힘을 모았던 공의회, 동시에 분열을 확정하는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6세기 이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됩니다. 이어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서유럽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동방의 비잔틴 제국은 법적으로는 여전히 서방을 통치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교황만이 서방 세계의 유일한 권력 중심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8세기, 비잔틴 황제들의 성상파괴 운동은 두 기독교 세계의 분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에 로마 교황은 '정치적으로' 생각합니다.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비잔틴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준 사건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 선언이었으며, 새로운 서유럽 기독교 제국의 출범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질문이 교회 위로 떠오릅니다.
❛서방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서유럽의 새로운 주인, 게르만 계통의 엘리트들은 오랫동안 서방 교회의 질서를 좌지우지했던 그리스 문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비잔틴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된만큼, 자신들의 라틴 관습을 강조하며 동방과 차별화된 우위를 점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선호'나 '신학적 정당성'보다는 새로운 권력의 정당화 작업으로 보입니다.

필리오케는 라틴어로 ‘그리고 아들에게서’를 의미합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정해진 신경
‘성령을 믿습니다.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
서방교회에서
‘성령을 믿습니다.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
라고 수정한 것입니다.
작가는 <중세교회사>에서 샤를마뉴와 필리오케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필리오케가 단순히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새로운 서유럽 제국이 동방의 비잔틴 신학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정치적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782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샤를마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신학적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공의회에 서방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정치적 배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중세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신학적 논쟁이 정치적 위상의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해서 신학적 이유가 거짓이라는 것도,
신학적 이유가 있다고 해서 정치적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신학 고문들을 통해 필리오케라는 신학적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스페인 지역에서 확산되던 아리우스주의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필리오케를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목표는 동방 교회 신학과의 차별화였습니다.

❝필리오케 문제가 정말로 모진 핍박과 수많은 이단들을 이겨내고 지켜낸 교회를 둘로 갈라놓을만큼 심각한 문제일까?❞
역사적으로는 동서 교회가 거의 25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이 문제를 두고 논쟁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신호와 같습니다. 표면적인 명제 뒤에 더 깊은 이해의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필리오케 사건이니, 성령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히브리 성경(히브리 구조 속에서 쓰인 성경, 곧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말씀과 영은 기능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와 같습니다.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오는가, 혹은 성자로부터도 나오는가의 문제는 철학적 사유 위에서 마련된 ‘합리적인’ 질문인 것은 맞지만, 성경이 태어난 히브리 세계와는 결합되지 않는 질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방과 동방 교회는 서로 다른 신학의 언어와 개념 체계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동방은 ‘일체성’을, 서방은 ‘체계성’을 강조했습니다. 동방은 ‘경험적 신비’를, 서방은 ‘개념의 명확성’을 중심으로 성령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말씀과 영의 구분?
성경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이 태어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소위 문화적 세계관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더군요.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삶과 언어, 사고방식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과 영(루아흐)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과 같습니다.
독일의 구약학자인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 예언, 구속의 모든 장면에서 말씀과 영은 하나로 작용한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 속에서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즉시 성취되어 ‘활동’이 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씀도 헛되지 아니하고
내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며 내가 보낸 일을 이루느니라이사야 55:11
말씀이 단순한 ‘언어’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역사하는 살아있는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이 활동의 주체는 동시에 성령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과 영은 기능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만 그럴까요?
히브리인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신약도 이 개념이 그대로 계승되어 있습니다.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한일서 5:6
중요한 것은, 성령이 단순히 비인격적 에너지나 영향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 랍비 문헌에서도 루아흐 하코데쉬(그 거룩한 영)는 인격적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이때 루아흐에게 붙는 인격성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구분짓기 위한 존재론적 구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능과 행위의 주체를 의미하는 인격성에 더 가깝습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 교부 클레멘스는 여전히 이 히브리적 전통 위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말씀의 힘은 성령이다.
이는 마치 피가 몸의 힘인 것과 같다.이방인에 대한 권유, 제20장
말씀과 영을 몸과 피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로 표현하고 가르칩니다. 교부들이 여전히 히브리적 이해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4세기, 삼위일체 논쟁이 이러한 통전적 사고를 변화시킨 것은 아닐지 추측해 봅니다.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리우스와 같은 이단자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낮은 피조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교회는 ‘성부’가 누구이고, 어떤 본질을 가졌는지, 또 성자가 어떠한지, 성령이 어떠한지 명확히 정의해야 했습니다. 당시 가장 정교했던 도구는 헬라 철학의 언어와 개념이었습니다.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신고전주의 회화. 진리와 정의를 위한 철학자의 죽음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의 순교’로 기억되며, 시민적 용기와 자유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가 생존하고 신앙을 방어하려면, 제국의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신앙을 재표현해야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논쟁할 때, 요한복음의 단순한 선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는 진술을 정밀하게 해석하고, 철학적 용어로 설명해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헬라 철학의 범주를 차용하여, 성부, 성자(말씀), 성령을 각기 구별되는 위격으로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성을 공유함을 주장했습니다. ‘하나의 하나님’을 방어하는 데 아주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과 영을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신학에서 말씀은 계시와 창조같은 하나님의 특정 사역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성령은 그 사역을 돕거나 그것을 해석하게 하는 별도의 인격적 보혜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영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부 문헌에서 성령은 이제 ‘말씀 해석의 인도자’로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말씀은 고정된 텍스트가 되고, 성령은 그것을 ‘풀어내는’ 도구처럼 보여집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삼위일체의 신학을 풀어 읽어내면, 결국 ‘일체’의 개념으로 모이게 되지만, 설교를 듣고, 일상을 사는 ‘교회’에게 말씀과 영은 구분되어 이해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의 종교사 연구를 들여다 보면, 이 흐름이 조금 더 와닿습니다. 히브리적 배경을 두고 있는 학자 다니엘 보야린은 유대-기독교 초기 문헌들에서 ‘말씀-영-지혜’의 구분이 매우 유동적이었으며, 별개의 위격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내적 활동의 다양한 표현으로 수용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유대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이방 구성원이 늘어난 초대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위하여,—동일한 구약과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유대교의 해석 전통을 거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굵직한 해석이 바로 ‘알레고리적 해석’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성경을 세 층위(또는 네 층위)로 해석하는 방법을 체계화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의도는 신앙을 보다 깊게 하고, 이단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을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그 이후 더 깊은 차원으로 풀어나가는 유대교의 해석 전통이 배제되고, 교회에서 대두되는 신학적 관심, 혹은 일상의 문제에 맞춘 재해석만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후 알레고리적 해석은 곧 대체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대체신학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적 왜곡 |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다. |
| 신학적 결론 | 따라서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고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삼으셨다. |
| 경전의 재배치 | 구약의 모든 축복과 약속은 이제 교회에게만 속한다. 유대인에게 남은 것은 저주와 심판뿐이다. |
로마 제국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법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 유대교와의 연결은 기독교에게 생사의 문제가 걸린 정치적 위험이 되었습니다. 이 위험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면, 유대인들과의 단절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러한 삶의 필요를 신학적으로 포장한 것이었습니다.

대체신학은 중세 교회의 제도적 차별로 이어졌습니다. 신학적 해석이 법적, 사회적 현실로 이어지던 시대였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에게 기독교인과 구별되는 복장 착용을 의무화하고, 공직 진출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러한 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정당화된 것입니다.
이후 비엔나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사회적 접촉을 최소화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6세기 교황들은 로마에 게토(유대인 거주 구역)를 강제하고, 유대인들의 노란 모자 착용을 의무화합니다. 또한 유대교의 정신적 뿌리인 탈무드를 말살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집니다.

로마의 유대인 거주 구역(Ghetto di Roma)에서의 활기찬 일상을 묘사한다. 당시의 좁은 골목, 빨래줄, 이동 상인, 아이들의 놀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도시 생활과 지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 자료로 평가된다.
이 모든 정책들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고, 공교회가 합의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고통과 억압이 교회에게 역사적, 정치적 선택이 아닌 하나님이 정한 거룩한 질서로 재해석 된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분명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오직 성경’의 외침은 히브리어 원전 연구의 필요성을 화두로 끌고 왔습니다. 마틴 루터는 라틴어 불가타 번역에 의존하던 중세 교회를 비판하고, 원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신학사의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 전통과 맥락 속으로 돌아갈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원문 복원 운동이 시작되면서, 유대교의 해석 전통에 대한 학문적 관심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개혁 초기, 루터는 유대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루터는 《유대인들도 우리 형제이다(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1523)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세 교회의 차별적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유대인에 대한 초기 입장을 담은 소책자. 본 문서에서 루터는 예수가 유대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며, 중세 교회의 반유대 정책을 비판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기회를 주장하였다.
본문은 비텐베르크에서 1523년에 인쇄되었다.
@Herzog August Bibliothek, Wolfenbüttel
루터는 자신의 기대와 계획이 착실히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던가 봅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진정한 복음'이 유대인들을 감화시켜,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전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에 루터의 태도는 극적으로 변합니다.

작자 미상, 1614년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거리 약탈 목판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Von den Jüden und iren Lügen)》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 회당을 불태우고, 집들을 부수며,
탈무드를 빼앗고, 강제 노동을 시킬 것을 권고합니다.
장 칼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불경한 개’라고 칭하며 경멸했습니다.
이러한 반유대적 저작들이 20세기에 다시 소환됩니다. 나치는 루터의 저술을 재인쇄하고 적극 배포했습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유대인들의 상점과 회당을 습격하고, 그들을 체포하고 살상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치는 루터의 저작을 정당화의 근거로 직접 인용했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히브리적 유산이 소실된 것은, 단순히 신학적 무지나 의도적 왜곡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직면한 상황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는 제국의 비합법적 종교였습니다. 로마로부터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아리우스주의, 도세티즘, 영지주의 등의 도전에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313년 이후, 교회가 제도 종교가 되면서 정치적 통일의 ‘도구’로 활용됩니다.

이렇게 숨가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교회의 선택들이 누적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생존을 위해, 더욱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증명해야 했고, 이단을 반박하고 교양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합리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헬라 철학의 언어와 구조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제국 내의 제도적 종교가 되어, 그 수가 핍박 받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늘어났을 때, 분명한 교리 선언과 조직적 규율이 필요했습니다.
이 모든 선택들의 누적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유대교와 사회적으로 분리되었고, 이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에 신학적 분리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문화적 배경인 히브리 전통과의 단절을 불러왔습니다. 탈무드와 랍비 문헌을 강력하게 금하고, 이단시하면서 히브리어 성경 해석의 풍부한 자원이 차단되기도 했습니다. 라틴의 ‘정통’을 향한 욕심으로 구약을 본래 언어와 맥락에서 읽을 능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성경의 원래 맥락은 두텁게 쌓인 교회 전통 아래 묻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경이 말하고자했던 것들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튼튼하고 견고한, 또한 안전한 교회 전통 위에서, 성경의 맥락을 회복해야 합니다.
히브리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 원시적인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중세의 신학적 유산 모두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우리의 신앙 유산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믿는 것의 대부분이 이 역사 위에 있습니다.
헬라 철학의 기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니케아와 칼케돈의 신학적 업적은 여전히 교회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논쟁할 때, 요한복음의 진술을 정밀하게 해석하고 철학적 범주로 설명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없었다면, 헬라 철학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무너졌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은 확실합니다.
번역 과정에서 무언가는 반드시, 항상 잃어집니다. 히브리적 계시를 헬라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여 세워진 교회의 정통. 그 정통 위로 쌓인 수천 년의 역사. 우리는 지금 그 아래 흘리고 온 것을 다시 건져 올려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