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사람, 우리에게 마냥 낯선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을 믿는 우리에게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구분되는 다른 집단으로만 자리할 뿐, 그 자체로 주목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성경의 무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희미하기만 합니다.
이 모호함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성경의 저자인 유대인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사마리아는 배척과 적대의 대상이었고, 그 역사 속 발생한 성경을 이어받은 우리에게 사마리아는 '이방이 섞인 집단'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복잡하고 풍성한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수호자들』의 저자인 로버트 T. 앤더슨은 오랜 기간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사마리아인들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냅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역사와 신앙, 문화를 체계적으로 조망하여 우리에게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성경 속 한두 번 등장하고 사라진 집단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존재하며 그 신앙을 이어가는 수호자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한복음 4장 9절
아마도 사마리아인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그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구약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정복했습니다. 아시리아의 강제 이주 정책 아래 사마리아의 주민들은 이방으로, 동시에 여러 지역의 이방인들은 사마리아로 이주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의 기자는 이 사건을 종교적 타락과 혼합으로 묘사합니다. 이 사건은 유대 전통 속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인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섞였다'는 시각이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성서문화교육원
시간이 많이 흘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힘을 모읍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도 동참하고 싶어했습니다(에스라 4장). 그러나 유다의 지도자들은, '너희는 우리의 하나님을 찾을 권리가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두 분열 왕국의 갈등은 더욱 골이 깊어지게 됩니다.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과 별도의 성전을 세워야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성소가 그리심 산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민족적 차이를 넘어, 신앙의 중심지를 어디로 볼 것인가의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직을 박탈당한 만세사는 사마리아로 피신하였고,
장인의 지원을 받아 그리심 산에 새로운 성전과 제사 제도를 세웠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8.2. Loeb Classical Library,
H. St. J. Thackeray 영어 번역본(1930)을 참고
이러한 갈등은 신약 시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대화에서 우리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 중 어느 곳이 참된 예배의 장소인지 질문했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오랫동안 두 집단을 갈라놓았던 신앙적 긴장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당시 유대인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배척과 멸시의 상징이, 오히려 율법의 핵심을 실천하는 인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사는 부정한(섞인) 민족으로 알려져 있던 사마리아인의 기원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논쟁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사마리아의 수호자들』 안에 바로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유대인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통념으로 인해 단순한 혼혈 집단으로 축소되었던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북왕국의 전승을 보존한 공동체로 소개합니다.
하나의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분열의 시작은 솔로몬의 시대로 올라갑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말년을 어둡게 묘사합니다. 그는 이방 아내들의 영향을 받아 결국 이방의 산당을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세웁니다. 그런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분열을 예고하셨습니다.
끝내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한 북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남유다 왕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왕국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남유다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작가는 14세기의 역사가 아불파트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아불파트는 그의 기록에서 사마리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해석과는 다르게, 사마리아의 기원이 이스라엘 왕국의 초기, 사사시대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은 본래 정통 제사장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아들 비느하스의 계열이 아닌, 이다말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아론의 아들 비느하스의 자손 '오찌'였습니다. 어느 날 엘리가 제사에서 소금을 쓰지 않아 율법을 어기는 사건이 발생했고, 대제사장 오찌는 이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아차려 엘리와 결별했다고 합니다.
엘리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가축을 데리고 세겜을 떠나 실로로 이동해 독자적인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막에서 죄를 범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세 당파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아불파트는 기록합니다. 실로로 떠나지 않고, 여전히 그리심 산에서 참된 율법을 지킨 충성스러운 당파와, 엘리와 함께 실로에 새로운 성전을 세운 집단, 그리고 아예 다른 신을 섬기는 이단 집단이 그 세 당파입니다.
이러한 서술은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사마리아 공동체가 자신들의 기원과 정체성을 해석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님에도 이러한 자료가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의 자기 이해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을 유대의 성경에 기록된 아시리아 혼혈 집단이 아닌, 비느하스 제사장 가문을 잇는 정통 후손으로 인식합니다. 그들의 전승에 따르면, 오히려 —실로에 성막을 세우고, 이후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유대인들이 엘리의 변질된 전승을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처음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의 자리에 남아 있는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작가인 앤더슨 역시 아불파트의 전승을 단순한 방어적 신화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겜의 그리심의 성경적 전승을 고려할 때, 사마리아인의 주장이 일정한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세겜의 그리심 산을 중심으로 신앙을 지켜온 사마리아인의 자기 이해가 성경 본문과 무관한,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오히려 고대 이스라엘 신앙과 사마리아의 초기 전승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세겜을 언약의 기억이 각인된 장소로 묘사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창 12:6-7), 야곱이 돌아와 땅을 사고 제단을 세운 곳(창 33:18-20),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와 언약을 새롭게 한 곳(수 24장) 모두 세겜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사기 9장에서는 '세겜의 신전'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이처럼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은 단순히 신학적 논쟁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자리와 신앙의 기억은 실제 땅 위에서 고고학적 흔적으로 드러나며, 그들의 전승이 허구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곧 성경이 말하는 세겜과 그리심은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신앙의 중심지였고, 그곳을 둘러싼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중반, 세겜의 고대 유적지인 텔 발라타에서 진행된 대대적인 규모의 발굴은 성경의 전승이 단지 이야기 속 허구의 공간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성벽과 성문, 대규모 성소와 제의 시설, 제단과 종교 기구들이 발굴된 것입니다. 대략 기원전 16-12세기에 해당하는 가나안 후기 청동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이어진 종교 활동의 흔적은 세겜이 실제로 고대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후 유네스코와 레이던 대학이 공동으로 정리한 자료들은 텔 벨라타를 성경의 세겜으로 비정하고, 그 위상을 고고학사적으로 요약합니다. 즉, 세겜이 특정 문헌(특히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만 등장하는 허구의 배경이 아니라, 실제 고대 이스라엘 종교 지형 속에서 중심을 이루었던 장소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세겜을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것이 후대의 억지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의 전승인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온을 중요하게 여기듯, 사마리아인들은 지금까지도 세겜과 그리심 산을 신성하게 여깁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소라고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비판하며 소위 '짝퉁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 발굴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리심 산에서 5세기쯤 세워져 헬레니즘 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 성소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성벽, 제단, 제사용 동물 뼈,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백 점에 달하는 봉헌 비문이 나왔습니다. 누군가 제물을 바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책이 쓰여진 2002년 당시 발견된 것만 380점 이상입니다. 이는 그리심이 소규모의 제단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모여 예배하던 대규모 성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심 연구자들은 그리심 성소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구조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Biblical Archaeology Review
사마리아인의 흔적은 이스라엘 땅을 넘어, 지중해 세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그리심의 그리스식 표기인 '아르가리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디아스포라 사마리아인이 존재했으며, 그들이 해외에서도 그리심을 자신의 성소로 고백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심에 대한 신앙이 개인이나 작은 집단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잇는 한 공동체 차원의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과 고고학적 발굴은 세겜이 실제로 거대한 제단과 성소 시설을 갖춘 종교 중심지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자기 이해, 곧 본래 이곳이 신앙의 중심지라는 주장은 단순히 후대에 유다에 대응하기 위해 꾸며진 전승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신앙의 실제 기억과 맞닿아 있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겜과 그리심이 아무리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가 평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부터 제사장의 권위, 중심지의 충돌은 결국 두 공동체를 완벽하게 갈라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세겜과 그리심이 고대 신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이제 고고학적 발굴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단순히 성소와 전통의 연속만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확실했음에도, 정치적 이해관계와 외부 제국의 압력은 언제나 공동체를 흔들었습니다. 세겜의 웅장한 제단과 봉헌 비문이 보여주듯 ‘신앙의 중심’은 분명했지만, 그 중심을 어떻게 지킬지는 시대마다 다른 해답을 요구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갈등은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는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새로운 시험대였습니다.
페르시아 시대까지만 해도 사마리아 공동체는 비교적 안정된 틀 안에서 자신의 성소와 율법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이후 강하게 불어온 그리스 문화의 바람 속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인들도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 먼저 느헤미야 시대의 사건을 다시 살펴봐야합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한 유대 공동체는 예루살렘 재건의 과정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다시 세우고, 정통 유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외부와의 혼인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배타적 정책은 사마리아 집단과의 마찰을 가증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산발랏의 딸과 대제사장 요아다의 아들의 결혼입니다(느 13:28). 느헤미야는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고, 제사장의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기까지합니다. 산발랏이 사마리아 지역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문은 페르시아로부터 총독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갈등은 한 가정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집단과 사마리아 정치 권력 사이의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종교적인 대표로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가 언급될 때, 세겜이나 그리심 산이 단 한번도 함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갈등이 유대교와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대립이라기보다, 정치적 충돌이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대와 사마리아 공동체 사이의 영적 분리의 서막으로 기억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도 큰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페르시아에 충성을 유지했지만,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 3세는 알렉산더 편에 섰습니다. 그는 무려 8천 명의 군사를 지원하면서 알렉산더의 승리를 도왔고, 그 대가로 그리심 산 성전 건축을 허가받았다는 전승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후, 사마리아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됩니다. 새로 임명된 총독 안드로마쿠스가 부임했고, 새로운 이방 총독에게 사마리아의 귀족층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귀족들은 폭동을 일으켜 안드로마쿠스를 잔인하게 살해하기까지 이르렀고, 알렉산더 후계자들의 보복을 불러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 귀족들이 보관하던 여러 문서들이 세겜 인근 동굴에 은닉되었고, 훗날 발굴을 통해 문서들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발굴된 이 문서의 인명들을 보면, 많은 이름이 ‘야훼’ 신앙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모압·에돔·가나안 등 주변 민족의 신적 요소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인식처럼 사마리아 전체가 이방 종교에 굴복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름은 보통 특정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신앙을 반영하는데, 특히 귀족 계층은 주변 강국과 혼인·동맹을 맺으며 정치적 위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신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공동체의 일반 신앙과, 귀족 정치 엘리트들의 종교 실천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헬레니즘 통치가 깊어지면서,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사마리아의 그리심에도 총독을 임명했습니다. 그는 두 성소를 가리지 않고 모독했습니다. 이때 요세푸스가 전하는 기록에 흥미로운 문서가 등장합니다. 바로, 사마리아인들이 안티오쿠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대인과 동일시하지 말아 달라며, 스스로를 '시돈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편지는 사마리아 공동체 내부의 고민을 보여줍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참된 후손으로 여기며, 그리심 산과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반면 '시돈 사람'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일부 귀족층이나 상류층의 일부는 현실의 정치에 발맞추어 헬라 문화에 동화되려 했습니다. 비록 보수적인 신앙 공동체와는 구분되지만, 그들 역시 유대인과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티오쿠스가 두 성소를 함께 모독했을 때, 이방인들의 눈에 사마리아와 유다는 결국 같은 무리, 곧 '야훼를 섬기는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과 똑같은 억압을 겪어야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있었지만, 외부의 위협은 오히려 공동체를 단단히 묶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최소한의 정체성을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우리의 성소는 그리심이고, 우리의 율법은 모세오경이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에 맞서 마카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마타디아와 그의 아들 유다는 율법과 성전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끝내 유대의 종교적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그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목표 속에 '그리심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게는 여전히 그들의 성소가 무시당하는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랑스 화가 장 푸케(Jean Fouquet)가 그린 삽화로, 마카비 혁명의 핵심 장면을 묘사한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를 바탕으로, 유다 마카비와 셀레우코스 왕조 장군 바키디스의 전투를 중세적 시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히려 혁명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유대의 하스모니안 왕조는 사마리아를 적대시했습니다. 그는 세겜과 그리심 성소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이는 단순한 건물의 붕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눈에 보이는 증표가 사라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소의 본질이 모세오경 안에 이미 담겨 있다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성소를 잃은 순간, 율법이 새로운 성소가 된 것입니다. 돌과 나무가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남아 사마리아를 묶어 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유대의 역사와도 겹쳐집니다. 사마리아 성소가 무너질 때, 유대인들은 그 고통을 공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 유대인도 사마리아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 역시 토라를 붙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교는 사마리아인들이 먼저 걸어간 길을 뒤따라 가게 된 셈입니다.
지금도 그리심 산에서 율법을 지키며, 사마리아 문자로 기록된 토라 두루마리를 전승하고 있다.
Wikimedia Commons / Reinhard Pummer, The Samaritans: A Profile
사마리아 오경의 성격은 바로 이 역사적 경험을 반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신명기 27장 4절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기록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제단을 에발 산에 쌓으라는 명령입니다.
사마리아 오경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지만 제단을 쌓을 장소를 '에발 산'이 아닌 '그리심 산'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표기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소가 그리심이라는 신학적 선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오경만을 정경으로 붙들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당화하는 선지서와 성문서를 과감히 배제했습니다. 이는 무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의식적 선택이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이 두 갈래로 나뉘어 "두 딸"에게 주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 가운데 일부가 사마리아 오경 계열과 유사한 본문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사마리아 오경이 단순히 소수의 이단적 산물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내부에서 실제로 공유되던 본문 전통 중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오경이 후대에 꾸며진 텍스트가 아니라 유대 전통과 나란히, 일찍부터 존재해 온 정경 전승의 한 갈래였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오직 토라만을 정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또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을 성소로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의 해석법이 유대인과 전혀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두 집단은 놀라울 만큼 비슷한 방식을 따랐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미드라쉬와 할라카를 통해 율법을 생활 규범으로 풀어냈듯, 사마리아인들도 오경을 삶의 울타리로 삼았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부정한 동물은 무엇인지, 정결례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전승에도 본문을 명확히 하고, 실천을 보강하기 위한 주석과 덧붙임의 문화가 나타납니다.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삶의 규범으로 강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명확합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서와 성문서를 함께 읽으며 율법을 해석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토라 안에서만 근거를 찾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마리아의 신앙은 훨씬 더 율법 중심적이고 단순한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해석할 때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십계명 조항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58장이나, 느헤미야 13장 같은 선지서와 역사서 본문을 함께 읽습니다. 즉, 율법 자체뿐 아니라 후대 예언자들의 해석과 실천을 근거 삼아 안식일의 의미를 확장해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교는 보다 전체적이고 풍부한 해석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안식일 규정의 모든 해석을 토라 안에서만 찾았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 출애굽기 35장 같은 본문이 최종적이고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그 자체로 완결된 규정이었고, 그 외의 본문은 참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신학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메시아 이해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윗의 혈통에서 오실 왕을 기다렸다면,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린 분은 '타헤브 תאהב', 곧 '돌아오시는 자/회복시키는 자'입니다.
이름 그대로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고 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대의 근거는 신명기 18:15-18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실 것을 붙들었습니다. 따라서 타헤브는 정복과 심판을 주도하는 왕이라기보다, 말씀을 새롭게 하고, 길 잃은 이들을 인도하는 예언자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관점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 그대로 비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한복음 4장 25절
메시아(타헤브)에 대한 기대가 '모든 것을 알려주심'에 있습니다. 이는 다윗 왕의 권세라기보다, 모세와 같은 교사의 권위를 가리키는 사마리아적 기대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메시아(타헤브)는 무엇보다 '가르치시는 분'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오래도록 자신들을 율법의 수호자라고 불러 왔습니다.
별칭이 아니라 정체성의 핵심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순수하게 지켜 온 참된 이스라엘이라 여겼고, 이 정체성은 공동체를 견고하게 유지해 주었지만, 동시에 모세-율법-성소라는 닫힌 구조 안에 머물게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메시아, 타헤브는 왕조의 후계자가 아니라 신명기 18장의 약속된 선지자, 곧 하나님의 뜻을 다시 들려주는 교사로 이해된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사도행전 7장에 등장하는 스데반의 설교는 흥미로운 연결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모세를 길게 상기시키며, 신명기 18장 15절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사도행전 7장 37절
일부 학자들은 그의 설교가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점에서 사마리아 전통과 닮아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스데반의 설교 전체를 살펴보면, 그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한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해석합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수호자의 열심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약속으로 새롭게 읽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데반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 '율법이 증언하던 그분을 증언하는 일'로 듣는 이들의 시선을 옮깁니다. 수호의 신앙이 증언의 신앙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읽을 때, 생각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사마리아는 땅끝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가 아닙니다. 율법의 수호자였던 공동체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증인으로 부름받는 자리였습니다. 경계를 지키던 때가 지나고, 경계를 넘어 증언하는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땅끝을 향한 복음 확장의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의 기독교 합류는, 주변의 어떤 이방 민족 하나가 교회로 들어온 사건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오래전 율법 안에 감추어 둔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열리며, 언약을 지키던 이들이 증언자로 변모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이 있어 예수님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의 길은 달랐지만, 결국 하나의 진실에 합류합니다. 성소가 무너져도, 말씀은 무너지지 않는 성소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그들이 수호하던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사는 이스라엘은 왜 분열의 길에 들어섰을까?❞
그 시작은 앞서 잠깐 언급되었던 솔로몬 말기에 있습니다.
지혜의 왕으로 출발했지만, 그의 말년은 분열과 혼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과정을 단순히 정치사의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전환점은 이스라엘 왕에게 명령되었던 것,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졌던 경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인 왕에게, 그리고 민족 전체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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