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아이돌 세계관의 종말과 탄생

우린 어디서 왔나, su-su-su-supernova

2024.06.25 | 조회 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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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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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아이돌 세계관의 종말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케이팝 아이돌의 성공 공식에 세계관이 필수 요소처럼 거론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SM에서 선보인 엑소의 엑소 플래닛, 지금의 하이브를 만든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 등이 떠오르네요. 근래의 SM 세계관 중심에는 광야 Kwangya 가 있고요. SM Cultural Universe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가 혼재하고 인간과 아바타가 서로 교류하게 되는 미래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SMCU의 한복판에서 2020년 데뷔한 에스파는 현실 세계의 아티스트인 에스파 멤버와 가상 세계의 아바타 멤버인 아이ae에스파가 중간에 위치한 디지털 세계 Metaverse 에서 소통하고 성장한다는 세계관을 구축해왔습니다. 에스파의 매 활동은 기존의 아이돌 세계관이 의도한 대로 제법 공을 들인 설정집을 바탕으로 한 영상-서사를 따라가는 경험과 비슷했어요. 뚜렷한 콘셉트, 몰입 가능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명확한 팬층을 타겟하여 충성심을 유도하는 구도죠.

디지털 싱글 '블랙 맘바 Black Mamba'로 데뷔한 에스파(2020)
디지털 싱글 '블랙 맘바 Black Mamba'로 데뷔한 에스파(2020)

에스파를 비롯해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 콘셉트와 미디어 활용 구조는 실제로 꽤 유효하게 작동해왔습니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제작된 아이돌의 티저 사진, 컨셉 필름, 뮤직비디오, 음원, 음반 화보집이 짧은 기간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공개됐죠. 세계관이 있는 아이돌 그룹의 코어 팬덤이 단단해질 수록 소위 전문가 집단 혹은 케이팝 업계 등 관계자는 이 성공 신화에 세계관의 스토리텔링이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했어요. ‘스토리가 먹혔다’는 인식이 웹툰이나 드라마와 같은 아이돌 IP의 다각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1)

한편 최근에는 기존 아이돌의 세계관이 흔들리거나 달라지기도 하고, 세계관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돌이 잇따라 주목을 받기도 하면서 ‘아이돌 세계관의 종말’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아이돌 세계관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은 세계관이 없어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추측, 중소형 기획사의 아이돌 세계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 등은 더 이상 아이돌에게 세계관이 필요하지 않다는 근거가 되는 듯합니다.


아이돌 세계관의 종말과 탄생

사실 그렇죠. 모든 아이돌이 메타버스에 거주하는 아바타가 필요하거나 초능력을 사용하는 능력을 (오글거리게) 구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성공한 아이돌의 세계관을 기억하지만,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실패한 아이돌의 세계관도 무수히 많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을 구축한 아이돌의 시각 미감-결과물에는 명확한 장점이 있습니다. 일련의 활동 콘셉트에 통일성과 연결성, 궁극적으로 당위성이 부여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시각 미감을 사랑하고 수집하는 사람으로서 문득 생각해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상 수많은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는 저마다의 미감을 드러내며 관객-소비자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미지는 일상적으로 휘발되어버려요. 나의 관심사와 맞는 소수의 선택된 이미지만이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되고, SNS에 유통되고 북마크되며, 점차 기억 뉴런의 일부를 점거하고,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어 마침내 하나의 취향이 됩니다.

에스파 정규 1집 '아마겟돈 Armageddon' 티저 이미지
에스파 정규 1집 '아마겟돈 Armageddon' 티저 이미지
디지털 세계의 인간과 아바타, AI 등을 세기말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에스파 공식 홈페이지(aespa.com)
디지털 세계의 인간과 아바타, AI 등을 세기말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에스파 공식 홈페이지(aespa.com)

세계관은 아이돌의 이미지를 일정한 결로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유효한 기제로 작동합니다. 반복적인 노출은 취향에 맞는 고객을 끌어들이는 기본 전략이죠. 또한 일련의 시각 이미지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의상, 배경 등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각각의 완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세계관이 아무리 촘촘하고 서사의 밀도가 높아도, 이를 실제 아이돌과 잘 결합시켜 시각화 하지 못하면 의미 없는 시도일 겁니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니까요.


'우린 어디서 왔나', 질문은 계속 된다

에스파의 정규 1집 <아마겟돈Armageddon>은 기존의 세계관을 영리하게 비틀고 가감하여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구현해낸 결과물입니다. 에스파의 세계관은 SM의 경영권 분쟁과 함께 한때 어른들의 사정 속에서 현실 세계 Real world 로 방향을 선회하는 듯 싶기도 했습니다.

표류하는 듯 보이던 에스파의 디지털 세계는 이번 앨범에서 다중우주 Multiverse 로 확장됩니다. 선공개곡 '수퍼노바 supernova'는 '쇠맛'나는 에스파의 귀환, "쇠일러문"으로 불리며 코어 팬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에스파를 명확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선공개곡 '수퍼노바Supernova' 뮤직비디오 (썸네일)
선공개곡 '수퍼노바Supernova' 뮤직비디오 (썸네일)
선공개곡 '수퍼노바Supernova' 비하인드 (썸네일)
선공개곡 '수퍼노바Supernova' 비하인드 (썸네일)

수퍼노바, 빛을 내뿜으며 폭발하는 초신성을 통해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멀티버스의 에스파는 "문이 열리고 서로의 존재를 느"낍니다. 현실의 에스파와는 다른, "나를 닮은 너"지만 "너 누구야"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초능력을 가진 초인입니다. 

카리나가 차의 사이드미러를 뜯어 손거울로 쓰는 인트로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일반인의 시선을 끄는 윈터의 등장, 이어서 벽을 뚫고 들어와 온 집안을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닝닝과 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돌려버리는 지젤까지.

'수퍼노바' 뮤직 비디오 속 에스파의 일관되지 않은 외모, 일상적이지 않은 의상, 뒤틀리는 앵글과 빠른 장면 전환 등은 멀티버스 세계관 하에서 당위성을 부여받습니다. 새로운 에스파는 초신성에서 태어났지만 별의 한계를 초월해 새로운 다중 우주를 불러냈습니다. 향후 에스파가 그려갈 모든 캐릭터는 '가능한 모든 가능성 무한 속의 너'를 만나는 과정이 되겠죠.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종말의 풍경

타이틀곡 '아마겟돈 Armageddon'은 지구의 종말과 선과 악의 결전을 뜻합니다. 뮤직비디오 제작사는 기획사로부터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포인 코즈믹 호러 Cosmic Horror, 멀티버스, 초인, 각성, 우주, 외계인 등의 키워드를 전달받았습니다. 제작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제를 표현할 때 '단순히 기괴해서는 안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

이를 위해 제작사는 글로시한 소재와 레진 등의 포인트를 적용했는데 이는 메탈릭한 소재를 스킨 질감으로 해석한 결과물입니다. 플렉서블한 유기체와 같은 그래픽 디자인은 물론 뮤직비디오의 촬영, 조명, 아트, 특수효과, 아티스트의 무브먼트까지 뮤직 비디오의 모든 요소는 의도에 맞게 세세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각적 미감의 구현이라는 명확한 기획 의도처럼, 뮤직비디오 속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타이틀 곡 '아마겟돈 Armageddon'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타이틀 곡 '아마겟돈 Armageddon'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타이틀 곡 '아마겟돈 Armageddon'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타이틀 곡 '아마겟돈 Armageddon' 뮤직비디오 ⓒSM엔터테인먼트

아마겟돈은 성경에 기대어 있는 용어이지만, 뮤직비디오의 미감이나 에스파의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고 있으면 언뜻 파괴의 신 시바가 떠오릅니다. 인도 신화 속에서 시바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입니다. 또한 힌두 사상에서 파괴는 창조와 맞닿아있습니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힘은 동시에 세계를 변화시키고 재건할 수 있는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 세계의 파괴와 변화가 필요한 법이겠죠. 과거의 세계관을 '거침없이 깨뜨리고' '내 모든 걸 이끌어 완전한 나를 이뤄내'는 중인 에스파의 세계. '나'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자 '나만이 나를 정의한다'라는 슬로건은 사실 시각화하기에는 지나치게 폭넓고 밋밋한 독백일 수도 있지만요. 3)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각 디렉팅이 함께한다면 새롭게 자신을 정의해가는 에스파가 보여줄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각주

1) 조민선, 「K팝 아이돌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한류NOW』 2020년 3+4월호; 조민선·정은혜, 「한국 아이돌 콘텐츠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 : EXO와 BTS를 중심으로」, 『인문콘텐츠』제 52호, 2019

2) [인사이드 케이팝 EP.15] '돈 내고 봐야되는거 아님?' 미친 퀄리티로 화제 된 '아마겟돈' 뮤직비디오 제작자 만나봄 (스브스뉴스, 2024. 6. 18)

3) "에스파는 에스파로 정의" SM 총괄 디렉터 밝힌 aespa 유니버스 (스타뉴스,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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