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연극 좋아하세요? 최근에 저는 이실론 작가님의 추천을 받아 <벚꽃동산>을 보고 왔어요. “제가 본 벚꽃동산 중 제일 좋았습니다.” 이렇게 추천을 받았는데 어떻게 안 볼 수 있겠어요? 1층 자리는 전석 매진이라 2층에서 봤는데요. 무대 연출을 한번에 볼 수 있어서 2층석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배우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섬세하게 따라갈 수는 없지만, 무대 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이먼 스톤이 연출하고 전도연 배우, 박해수 배우가 나온 <벚꽃동산>은 어땠냐고요?
초연 이후, 120년 뒤 핀 벚꽃
각색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나 한국의 사정에 맞춘 각색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이먼 스톤이 각색하고 연출한 <벚꽃동산>(2024)은 초연 이후 120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잘 녹여서 빚어냈습니다. 우선 벚꽃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안톤 체호프의 원작에서 벚꽃은 긴 혹한이 끝나고 찾아오는 봄이죠. “별장지(別莊地)”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임대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하지만 사이먼 스톤의 벚꽃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자본의 역사를 품고 있어요.
벚꽃이 가득 피는 동산을 품고 있는 이 집은 송도영(전도연 분)이 열여섯 살에 선물로 받았습니다. 게다가 유명한 일본인 건축가가 지은 집이라서 건축사적 의의도 가지고 있어요. 배역의 나이대를 살폈을 때, 족히 30년은 넘었을 집에서 풍겨지는 뉘앙스는 일제강점기부터 군부 독재 시절까지 이어져 오는 뿌리깊은 자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영화 <파묘>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부자”인 가문을 연상시키죠. 그들은 그의 부를 정경유착을 통한 인맥으로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그 유통기한도 끝이 납니다.
IT 스타트업을 창업해 부자가 된 것처럼 보여지는 황두식(박해수 분)은 무너져가는 송씨 가문의 대기업을 ‘다운사이징’을 통해 살려보고자 하고, 송도영의 첫째 딸 강현숙(최희서 분) 역시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처음부터 부유했던 송도영과 송재영(손상규 분), 재벌2세 남매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판단하지 않아서 생기는 피해는 고스란히 3세대인 강현숙과 강해나(이지혜 분)에게 전가됩니다.
이것은 세 모녀가 그리고 우리가 지닌 불안이다
사이먼 스톤의 각색이 원작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송도영, 강현숙, 강해나 이 세 모녀에게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캐릭터의 핵심 서사는 간직한 채 그들은 현대적인 문제를 새롭게 가지고 있죠. 중년이 되었어도 아름다운 외모, 성적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송도영은 그 자체로 갈등의 중심이 됩니다. 둘째이자 막내인 강해나는 미국에서 엄마인 송도영과 함께 살며 사실상 보호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갓 대학생이 된 강해나가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죠. 맏이의 책임감을 진 채, 입양아라는 생각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강현숙은 제대로 된 휴가도 가지 못한 채 회사를 살려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 모녀가 “잘 살아보겠다”라는 생각으로 시도하는 모든 것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실패합니다.
엄마가 자살할까봐 밤새 불안에 떠는 강해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강현숙, 막내 아들을 잃고 영원한 상실감에 젖은 송도영. 재산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해주는 데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 모녀의 삶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죠. 그들은 가야할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 차이가 <벚꽃동산>(2024)을 현대적으로 만듭니다. 체호프가 희곡을 썼을 당시만 하더라도 무능한 귀족은 몰락하고, 농노는 자유를 찾아 해방되며 새로운 미래가 찾아오고 있었죠.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처럼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소설의 이론)였다면, 21세기는 “가야할 길”을 끝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할 방향을 잃은 현대인들의 불안은 송도영처럼 ‘알콜중독’으로 나타나거나, 지식인인 ‘변동림(남윤호 분)’의 의견을 따르거나, 그저 신예빈(이세준 분)처럼 불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아니면 이주동(이주원 분)과 정두나(박유림 분)처럼 허영과 본능을 쫓는 수밖에요. 그러나 세 모녀는 그저, 길을 잃은 채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 불안한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자본을 쫓는 황두식만은 자기가 가야할 길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목적을 쫓는 그만이 “새로운 시대로 가자”라고 외칠 수 있죠.
무대 위의 사건은 동시에 벌어진다
시간은 예술 장르를 구분할 때 기준이 되어줍니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무대 위에서 사건의 흐름이 한번에 펼쳐지느냐, 아니면 구분해야 하느냐의 차이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 무대에서 사건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죠. 사울 킴이 디자인한 무대는 옥상, 2층, 1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집니다. ‘모든 캐릭터가 자신만의 서사를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사건을 일으키는’ 체호프 희곡의 특징을 무대 미술로 한번에 보여주었죠.
영화는 화면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사건들은 정지해 있어야만 하죠. 사건이 벌어지고 있더라도 그 시간을 압축해서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극은 그 모든 사건이 동시에 무대에서 벌어져요. 이것은 연극만이 가진 역동성이라고 생각해요. 관객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무엇을 선택해서 봐야만 합니다. 송도영을 선택할 수도 있고, 변동림과 강해나를 선택할 수도 있죠. 하다못해 계속 청소를 하고 있는 정두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연극 무대 위의 배우들은 퇴장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의미있는 행동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먼 거리에서 연극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조목조목 살펴볼 수 있으니까요.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기후 위기는 코앞으로 닥쳐왔죠. AI는 편리하지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어요. 미래에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송도영이 열여섯 살 생일 선물로 받은 집은 김영호(유병훈 분)의 죽음과 함께 무너집니다. 이 집과 관련된 인물들은 마지막에 다다라서 모두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죠. 그러나 원작에서만큼 희망차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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