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일요일 오후, 조금 늦은 편지를 보냅니다. 현대인의 일상이 늘상 그렇듯 사방에서 쏟아지는 이미지가 넘치는 삶이에요. 그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이미지를 수집하고, 나열하고, 무드보드 Moodboard 를 만들면서 지난 이 주를 치열하게 보냈는데요. 정작 이미지 사이에서 텍스트를 길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좋은 책을 읽게 되어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한동안은 고요하게 서 있고 싶었다
“원래라면 내 결혼식이 열렸을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해 가을, 나는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책소개를 이렇게 시작하면 참 작위적이다 싶은데요.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죠. 저자 패트릭 브링리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자 경험한 삶을 에세이로 풀어낸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베스트셀러로 꽤 이름을 알렸습니다.
가까운 가족인 형의 죽음은 브링리에게 삶의 의욕을 꺾을 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의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를 두고 브링리는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 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고 덧붙이죠. 그렇게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저자는 방관자의 삶을 택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서 시간이 한가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동안, 동시에 그는 시각적으로 미술품을 충분하게 감상할 시간을 부여받습니다. 틈틈이 이집트 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며 “책으로 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기도 하고, 한자로 적힌 구절을 보며 “말로 형용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하고 또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감각적인 경험이 언어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지” 깨닫기도 하지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걷기
브링리의 글을 읽고 있으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일주일 내내 거의 완전히 흥분한 상태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여러 번 재차 방문했어요. 뉴욕의 다른 미술관들과 하이라인 파크를 비롯한 온 동네를 틈틈히 누비고 다닌 걸 생각하면 동행이 고생스러운 일정이었지만요. 메트로폴리탄의 컬렉션을 본 뒤 제가 할 수 있는 건 책 속의 어느 관람객처럼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좀 봐요..." 같은 표정으로 계속 보고 또 보는 것 뿐이었어요.
빈센트 반 고흐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이 그림 앞에서 말라빠진 빵 조각이나 먹으면서 2주일 정도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내 명을 10년은 단축해도 좋을 것 같아. (중략)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브링리는 동의합니다.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 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들
미술관 또는 미술에 대한 여러 글 중에서도 브링리의 에세이가 돋보이는 부분은 개인의 삶과 예술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유려함입니다. 화가의 삶과 자신의 모습이 교차되는 지점들을 풀어내는 방식이 진정성 있고 섬세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 수확>이라는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요. 광활한 풍경을 배경으로 농부 몇몇이 오후의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두고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는 저자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작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듯합니다.
브륄리의 시대에 소작농의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화가의 의도를 상상하는 것. 그리고 브링리 자신의 삶에서 아픈 형이 병실에서 치킨 맥너깃을 먹겠다고 말하던 밤을 연결지어 "맨해튼의 밤거리로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던 그때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반추하는 것. 지나간 시대를 묘사한 그림은 정지해 있지만, 현대에 우리의 눈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얻고 살아 숨쉬게 되는 느낌이었어요.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거쳐 브링리는 10년간 몸담았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을 그만두게 됩니다.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갈 결심이 선 것이죠.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 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리고 예술은 그에게 위로의 장이었고, 오랜 친구였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제 브링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없겠죠. 잘된 일이에요. 그리고 그의 책은 더 많은 사람들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또는 또 다른 미술관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거라 믿어요.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예술은 평범한 것과 신비로움 양쪽 모두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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