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합니다

2024.10.16 | 조회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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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주석

말보다 글이 유창한 인간의 주절주절

 

부엌이 편했다. 기름 묻은 접시는 키친타월로 싹 닦아 휴지통에 버리고, 큰 접시부터 작은 종지 순서대로 수세미질을 하고, 물기를 닦아 건조대에 거치하니 비로소 1인분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할머니 접시는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것은 모던하고 저것은 엔틱하고, 다이소풍 옆에 에르메스풍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인가 믹스앤매치가 집안 내력인가 고심했다. 내친김에 싱크대에 묵은 때를 닦아 광을 내니 효손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달갑지 않은 시선, 잠자코 있던 엄마는 “적당히 잘해야지 다 혼자 해. 으휴.” 하며 말을 줄였다. “잘해도 뭐라 하면, 평생 더 잘해야지.”라며 메롱 같은 반격을 날렸다.

 

할머니는 종일 “예쁘다. 예쁘다.” 했다. “우리 손주는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접시도 예쁘게 놓는다.” 그랬다. 그리곤 “이렇게 예쁜데 왜 장가를 못 갈꼬.”를 꼭 덧붙였다. 그럴 때면 남은 송편이며 과일을 입에 문 채로 설거짓거리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하늘도 무심하다. 부엌데기가 운명인가?’ 싶어 잠시 서러워졌다. 엄마는 예전엔 칭찬이었으되 지금은 핀잔인 말을 늘어놨다. “어머님, 쟤 집에 가보시면 놀라실 거예요. 먼지가 하나도 없어요. 이불 각이 딱 잡혀 있어요.“ 모든 것을 혼자 열심히 해내려는 나를 두고 엄마는 두고두고 가슴 아프다 했다. 할머니는 “오매 오매 그러냐. 우리 손주 참 예쁘다잉. 왜 장가를 못 갈꼬.” 하며 결혼하지 않는 손주를 걱정했다.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있을 뿐, 틀린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틀에 맞히려 나를 녹여낼 생각은 없다. 녹인 다음 얼릴 테니 말이다. 얼마 전 관리비 고지서를 받지 못해 주택관리 업체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업체 직원은 부인이나 애기들이 챙긴 건 아니냐고 물었고, 혼자 산다고 대답하니 “아, 그럼 자취하시는 거예요?”라고 물어왔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자취’는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으로 서술되어 있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가족을 떠나서 혼자 지내는 사람이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으로 풀이해 놓았다. 업체 직원의 말은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가까운 용례인 셈이다. 자취라는 단어에 담긴 일시성, 가역성, 연소성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관리 업체 직원의 눈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가정집으로 보였을까 임시 거처로 보였을까?

 

혼자 사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나라가 사회적 결합에 따른 가족의 형태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건강가정기본법에선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사랑이나 우정이란 그물망으로 가족 공동체를 꾸리고자 했던 나의 꿈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결혼하면 되잖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부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를 정상 가족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라 정의하는 것은 건강한가? 가족을 이루는 방법으로 혼인, 혈연, 입양 만을 고집하는 것이 시대에 부합하는가? 가족을 이루고자 친구를 입양했다면 비정상적인 가족일까?’라는 질문을 정책가에게 던지고 싶다. 혹시나 “법대로 해, 법대로!”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당신 같은 사람들, 매우 따분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주거에 관한 정부 정책은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느끼는 차별 중 하나이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보고서를 살펴보면 1인 가구의 거처 종류는 단독주택(43.9%)이, 점유형태는 월세(41.2%)가 가장 많았다. 두 주먹 불끈쥐고 ‘반드시 아파트랑 자가라는 해시태그를 얻고야 말겠어!’라는 태도로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의 탈을 쓴 늑대 임대인을 겪고 보니 지푸라기로 지어도 내 명의 집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임대주택으로 눈을 돌려봐도 1인 가구에게 주어지는 공급량이 현저히 낮고, 면적과 환경도 턱없이 남루하다. 언젠가는 결혼하겠지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1인 가구를 대하는 것일까? 국뽕 빼고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대한민국, 당신은 나를 몰라도 너무 몰라.’인 상황이다. 소꿉놀이하는 바이브 아니고, 현생에 대한 걱정과 희망으로 신중하게 내린 결단인데 말이다.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1.7%를 차지하고 그중 미혼이 50.3%인데, 나를 위한 정부 정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면서 싱글세 운운하는 정부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고 싶은 심정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상상할 기회를 주는 일, 정책가들의 몫일 테다.

 

할머니가 직접 짠 참기름 한 병과 들깨 한 봉지를 손에 쥐여준다. “집에 가서 묵으라이, 들깨는 좀 덜 볶았응께 꼭 후라이판에다 볶아서 묵으라이. 그리고 담엔 색시랑 와.” 한다. 할머니 사전에 포기란 없다. “할머니. 저는 ‘때가 됐으니까’를 적극적으로 배격하는 사람이랍니다. 때가 됐으니 결혼하고 애 낳는 일 없을 거예요. 다시 말해 사회가 제 알람에 손대도록 가만 놔두지 않겠습니다. 제 알람은 제가 직접 맞추겠습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너무 되바라져 보일 것 같아서 “네.” 하고 말았다. 묵은지 씻어 참기름에 볶고, 두부 삶아 도톰하게 썰고 참깨 솔솔솔 뿌리고, 수육을 삶고, 홍어 썰어서 상을 내야지. 할머니가 쥐여준 사랑을 전할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A더러 부침개를 부쳐오라고 하고, B에게 과일을 씻어 오라고 해야지.’ 생각한다. 아마 그럼 제각각의 접시들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우리집에도 말이다. 내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과 도란도란 따수운 식사를 나누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그런 자취 중이다.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DAY6 (데이식스) - I Stan U (관객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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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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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갭퍼

    0
    12 minutes 전

    따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끔 하는 글이네요.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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