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거 반품시켜본 적 있어요?”
우진은 산낙지에 초장을 부으며 말했다. 초장에 휩쓸린 흡반은 삼키는 듯 토해내는 듯 분주히 뻐끔댔다. 이수는 초장 그릇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달큰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핏대 선 대화가 사그라들 때 이수가 우진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우진씨, 우리 소개팅 중이에요.”
우진은 지하철에 내리자마자 코 바로 아래까지 목도리를 칭칭 감아 얼굴을 숨겼다. 그리곤 길가에 택배 트럭이 있는지 살폈다. 나름대로 한껏 빗뜬 눈꼬리가 무색하게 그의 눈동자는 흐리기만 했다. 이수는 그와의 소개팅 제안을 받았을 때 2년 전 체육대회를 떠올렸다. 황사가 심한 날이었다.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던 이수는 필사적으로 몸을 사렸다. 겸연쩍은 웃음으로 경기마다 참가를 마다하는 것도 지긋지긋할 무렵 족구 한 자리가 빈다며 선배들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킥킥대는 선배들을 가르고 이수의 마스크를 주워준 이가 우진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곤 “제가 할게요.” 했다.
인사과장은 밥 먹다 말고 대뜸 이수에게 우진의 사진을 보여줬다. “요즘 세상에 우진이만큼 착실한 남자 찾기 쉽지 않아. 재산이니 인물이니 해도 모름지기 남자는 성실이지.” 그의 성실함이야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차트와 씨름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덕분에 기사들 실적을 줄줄 외워댈 정도였다. 우진은 남들 하는 양에 배는 가져가야 성이 차는 듯했다. 그의 트럭은 늘 상자로 가득했고, 조수석 발판부터 천장까지 상자가 쌓여있는 날도 있었다. 이름과 실적 그리고 목소리, 이수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소개팅에 응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해볼 수 있을 때 해보고 싶었다.
“이수씨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했어요.”
병찬은 연신 박수를 때렸다. 우진은 그 소리에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 “드디어 니가 정신을 차렸구나. 그년 이야기만 들으면 내가 속이 까맣게 타는 것 같았다니까. 오늘 시원하게 마시고 다 잊자.” 그녀를 그년이라고 칭하는 병찬이 미웠지만 우진은 별말 없이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연거푸 들이켰다. ‘세상에 여잔 많다.’, ‘그래도 그렇게 정신 나간 여자는 그년이 유일할 거다.’하는 소리가 잔 속으로 들어갔다가 목구멍을 타고 심장에 콕 박혔다. 우진은 정말 궁금해졌다. ‘어떻게 살아있는 걸 반품시킬 수 있지?’ 그리곤 발 밑에 내려둔 상자를 톡 걷어찼다.
“소개팅 중에 할 얘긴 아닌 것 같은데요. 전 부푼 마음으로 그 애한테 같이 살자고 말한 거였거든요. 저녁 먹을 때도 계속 핸드폰으로 쇼핑 중이더니... 그러니까 비로소 저를 봐주더라고요. 진심이었어요. 제 눈이 빛나고 있음을 저도 느꼈으니까요. 걔는 그런 제 눈이 지긋지긋 하댔어요. 못돼 처먹은 년 만드는 건 바로 저 같은 사람들이라면서요. 미안하다고, 이런 이야기는 호텔이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경솔했다고,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다고, 다음부터는 절대 같이 살자느니 결혼하자느니 안 하겠다고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꺼지라고 악을 쓰고 울더라고요.”
우진의 반품 회수율은 꽤 높았다. 선배들 뒤치다꺼리로 반품 치러 다니는 젊은 기사들 수준이 아니었다. 일지 찍으러 사무실에 들어오는 기사들마다 그를 부러워했다. 다들 여자친구 덕이라고 했다. 최 씨는 본 적도 없는 우진의 여자친구를 엑스레이 찍듯 설명했다. “그 여자가 주방용품, 화장품, 개 사료.. 하여튼 닥치는 대로 사. 근데 하루도 못 가서 다 반품을 내놓는 거야. 콜센터랑도 그렇게 싸운다 그러네. 우진이 그 녀석이 입 꾹 닫고 있길래 인사과장한테 물어봤더니 그러더라구. 그 놈이 실적 채우려고 그 여자 만나는 거 아닌가 몰라. 아차, 담주에 우진이랑 소개팅 한다며? 벌써 소문 쫙 퍼졌어.” 묻지도 않은 대답과 대답 없을 질문이 난감해 이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서류 확인하는 척을 했다. 대꾸는 박여사가 대신했다. “남 연애사 가지고 나불대는 거 아녀. 어이 최씨, 발 치워봐. 좀 닦게.” 최 씨는 박여사를 노려보곤 종이컵을 구겨 쥐었다.
“그분은 우진씨가 아니라 자낙스가 필요했을 거예요.”
꺼지라는 외침에 외투만 챙겨 나온 우진은 복도에 주저앉았다. 반품 상자와 나란했다. 지나는 사람은 없었지만 괜한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고 일어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사람이었다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반품할 수 없을 만큼 흡족한 결혼 상대여야만 했다. 우진은 은행 앱을 켰다. 다섯 자리 숫자가 남은 월급 통장, 세 달 후 만기인 적금, 십 년째 붓는 청약 저축 그리고 이사 전엔 갚지 못할 전세 대출이 차례로 보였다. 형편이란 것은 사랑 앞에서도 빌빌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우진은 상자를 끌어 안았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반품 뿐이었다. 그리고 병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찬아, 안쓰럽고 미안해서 마음이 너무 아파.”
우진은 다음 할 말을 떠올렸다. “일을 줄이고 저녁에 헬스를 시작했어요. 여자랑 사귀려면 외모도 중요하다잖아요.” 고민이 길어질수록 엉망인 옷차림이 되는 것처럼 점점 꼬여만 갔다. “이수씨는 이상형 있어요? 요새는 육각형 남자가 대세라던데.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자신의 말이 진심인지 그도 헷갈렸다. 우진은 희미해진 흡반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그리고 힐끗 이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낙지를 꼭꼭 씹고 있었다. 눈은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 번갈아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 입은 옷이 제일 베스트네요. 제 전 여친 이야기나 더 할까요?” 그의 말에 그녀는 볼을 올려 싱긋 웃어보였다.
“우진씨는 육각형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사랑 앞에선 다들 한없이 작아져요. 육각형도 삼각형도 멀리서 보면 결국 점이잖아요. 우진씨처럼 속이 꽉 찬 점을 찾으세요. 그럼 선을 그릴 수 있을 거예요. 포부를 가지세요.”
이수의 말을 묵묵히 듣던 우진은 숟가락으로 낙지를 크게 떠 넣고, 움쑥 씹어댔다. 최면에 풀린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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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퍼
하루의 시작을 기분좋은 노래와 글로 시작할 수 있어서 좋네요ㅎㅎ 작가님도 2025년 좋은 일 가득한 한 해 되길 바랄게요! :)
주석의 주석
갭퍼님 감사합니다😊 다음 선곡도 세심하게 골라볼게요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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