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이었어요. 눈을 떴는데 아빠가 보였어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곤 어떻게 알고 방콕까지 혼자 오셨지 싶었죠. 아빠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셨어요. 가시덩굴이 몸을 휘감는 고통에 몸부림칠 때면 침대에 올라와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셨죠. 꼭 자궁 같다고 하니 아빠가 어깨를 탁 치며 웃었어요.”
수철은 물수건으로 병상에 누운 이수의 손을 자주 닦아주었고, 그럴 때마다 아들이 태어나 처음 손을 잡았던 그날의 신비에 휩싸이곤 했다. 의식의 끝엔 ‘우리 딸, 우리 딸’하며 핸드크림도 발라주었다. 그렇게 딸이란 단어를 입에 붙여 갔다. 일 년 전, 이수가 처음 물류센터로 출근하던 날, 수철은 대문까지 뛰어나와 말렸다. 형제들은 운동시켜라, 등치가 참 좋다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잦은 병치레에 마음마저 여렸던 아들이 험한 현장 일을 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얼마간 이수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세게 틀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세상의 것들을 씻어내야만 수철이 차려놓은 밥을 먹을 힘이 났다. 퇴근한 수철은 잠든 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손을 쓰다듬었다. 땀이 많다며 겨울에도 장갑을 끼지 않는 것이 늘 맘에 걸렸다.
이수를 암막의 커튼에 가두는 것은 자기를 향한 혐오감이었다. 수철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녀에게 늘 다정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이수 안에서 경기를 일으키곤 했다. 그녀는 사랑을 받을 때마다 땀이나 오줌으로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켜켜이 쌓여 시커멓게 고이기만 했다. 이수는 긋고 때리고 도려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내지르는 구급차 안에서 이수는 수철에게 선언했다. “나,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을 거야.”그렇게 들어간 물류센터에서 수술비를 모으기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이수씨 우리 지금 소개팅 중일까요?”
긴 이야기가 될 거라며 운을 뗐지만 어느 부분을 늘리고 줄여야 할지 그녀도 감을 잡지 못했다. 다만 그의 대꾸가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라는 걸 이수는 직감했다. 대부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헤어라인, 목젖, 가슴을 순서로 엑스레이 찍기에 바빴다. 우진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에게 폭 웃어보인건 배려에 대한 그녀 나름의 화답이었다.
이수는 차츰 물류센터 일에 적응해 나갔다. 쓰러져 자기 바빴던 처음과 달리 가끔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나갔다. 밑반찬을 만들고 이리저리 가구를 옮기는 작은 재미에 빠지기도 했다. 그즈음 수철은 텐의 전화를 받았다. 이수가 수술을 의뢰한 병원의 코디네이터이자 브로커였던 텐은 수철에게 아들이 받을 수술의 내용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날조한 사인과 정직한 전화번호가 만든 사단이었다. 수철은 아들을 향한 걱정을 삭이려고 애썼다. 자신의 노파심이 자식을 병들게 했던 악몽을 다시 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검색을 멈추었다. 얼마 전 수철은 이수에게 ‘알수록 무서운 적은 처음이었다.’ 고백한 적이 있었다.
“아빠랑 텐은 꼭 단짝 친구 같았어요. 하루는 둘이서 저한테 어울리는 짝을 찾아줬어요. 아빠는 박정남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했어요. 싫다니까 팔팔할 때 박정남이라면서 라이브 하는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 텐은 아빠보다 더했어요. 아이돌 가수들을 줄줄 읊으면서 침대에 사진을 붙여두기도 했어요. 아빠는 제가 여자가 된 것보다 남자와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셨죠.”
회사에서 이수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박여사였다. 다시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그녀는 “이수씨 시원해요?”하고 물어왔다. 박여사는 늘 정중한 말투로 정곡을 찔렀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물음에 “제 손 말끔하게 닦은 사람이 세면대 위까지 깔끔하게 청소하기 쉽지 않죠. 성정은 안 변해요.”라고 과녁의 정중앙을 뚫은 궁수처럼 상쾌하게 대답했다. 이수는 수천을 들인 얼터링이 무색하다며 농담을 건넸다. 박여사는 손을 잡아봐도 되냐고 물었다. 이수가 옅게 끄덕이자, 가만히 손을 잡았다. “이수씨가 처음 물류센터에 왔던 날부터 마음이 쓰였어요. 그땐 총각이니까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 가까이에 앉아보네요. 손도 참 예쁘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심플하게 사는 것이 보통인 세상이었다. 이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수는 회복하는 동안 몇 가지 자격증을 취득했고 여러 회사에 지원했다. 하지만 어리지 않은 나이에 경력 없는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통근이 가능한 회사라면 마구잡이로 지원하기를 반년만에 처음으로 전화를 받은 곳이 수술비를 벌기 위해 노동을 뛰었던 그곳이었다. 조건은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이었다. 누군가의 무단결근으로 비롯된 펑크를 메꾸어도 될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무 전선에 뛰어들어도 될지는 그녀에게 두려움 거리가 되지 못했다.
어떠한 거짓도 끼지 않은 대화는 그들에게 오랜만이었다. 진실의 열기가 그들의 뺨을 붉게 물들였고,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기회 되면 봐야지, 여유 되면 해야지 했다가 후회한 적 있지 않아요? 저는 꽤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오늘 고민을 박차고 나와서 이수씨를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솔직해지고 싶어졌어요.”
“언젠가는 우진씨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헤어질 때가 돼서야 이야기하네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진은 기묘한 상상을 시작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이수를 세우고, 그녀의 한 발을 중심 삼아 다른 발로 원을 그렸다. 그녀는 풀썩 주저앉는 순간 폭발했고, 뜨겁게 흐르다가 선에서 멈춰 굳었다. 까만 점이 외로워 보여 토닥였지만 혼자서도 뜨거웠다. 우진은 결심이 섰다. 다섯 걸음 밖에서 가능한 한 크게 원을 그렸다. 뜨거워질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 우진은 이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수씨 잘 들어가고 있어요? 월요일에 이수씨랑 박여사님이랑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 먹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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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퍼
노래와 함께 읽으니까 더더욱 좋네요!ㅎㅎ
주석의 주석
감사합니다 갭퍼님! 즐거운 시간 되셨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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