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책은 없다

2026.02.10 | 조회 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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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뽑기 맞추면 할아버지 싸대기 한 대 맞아.” 2021년 가을, 학교 앞 문구점 앞에서 벌어진 대화였다. 뽑기 할아버지는 못 들은 체했지만 10살 남아들은 뽑기 도구들을 발로 차고 행패를 부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경찰을 불렀고 뽑기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어르신, 아이들이 아직 어려요. 다치신 데도 없고 한번 봐주세요.” 아이들이 보고 따라 했다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어차피 치매잖아. 곧 죽을 사람인데 뭐.”

 

교직 생활을 거듭해 가면서 소망이 딱 한 가지 남았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을 그것이 알고 싶다 혹은 실화탐사대에서 보지 않기를’ 날카로움이 보이는 아이들 둥글게 깎아 한 학년 올려보내는 것을 당해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0년 전에는 애들이 싸가지가 있었나요? (아니요) 그럼 내 학창 시절엔 싸가지가 있었나요? (아니요) ‘10세 남아 뽑기 난동 사건’을 휘감고 있는 쇠사슬의 열쇠, 누가 쥐고 있는 걸까?

 

눈 가리고 악플 다는 것이 요새의 댓글 취향이라지만 노인에 대해 무지성으로 달리는 비방을 보자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실버 운전자의 사고에 관한 기사 아래 댓글창이 그렇고, 국민연금 수령이나 대중교통 무임승차에 대한 여론은 제도 출범 당시부터 노인을 욕받이석에 앉도록 만들었다. 기관에서 예측하지 못하고 뛰어든 사업인데 악플 여러 개가 대립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림 없다. 선한 개인이 모여 팀을 먹으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근래의 의식 흐름으로 보아 지나친 낙관론 같다.

 

지난 4월, 여러 연차의 선생님들이 모여 차를 마시는 자리였다. 새 학기에 대한 기대와 염려가 뒤섞여 누구나 말하길 주춤거렸고 결국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며 자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담임교사를 맡았다는 한 원로 교사는 “젊은 선생님들보다 손도 느리고 모르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좀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잘 적응해 보려고 합니다.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했고, 듣고 있던 동년배의 관리직 교사는 “선생님 적응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생존하셔야 해요.”라고 했다.

 

이 대화를 듣고 찝찝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적응’은 무엇이고, ‘생존’은 무엇일까. 자려고 누웠더니 침대 가장자리에 높다란 울타리가 솟았고, ‘울타리 안은 적응 그리고 울타리 밖은 생존이구나!’ 생각이 미쳤다. 두통이 오고 속이 메슥거렸다.

 

‘최근 교육 환경이 급변했습니다.’라는 문구를 자주 접한다. 수업 도구에 AI 기반의 자료들이 도입되고, 교수학습 방법이 다변화 돼서인 것 같다. 하지만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교육은 아니 사회는 늘 급변했다. 돈은 현물과 가상을 순환하고, 기술은 매일이 새로워졌고, 아노미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원료 교사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적응을 해낼 것이다. 그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 울타리 밖으로 내쫓으려는 ‘내부의 적’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대단한 철학을 갖게 된다거나, 사려 깊고 진중해질 것이라는 일종의 미신을 믿고 있는 것 같다. ¹‘미신’인 이유는 악플 쓰고 있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²사람을 책에 비유하면 90%는 헌책이고, ³대부분은 개정판 없이 초판으로 마감한다. 엄청난 부를 갖게 된다거나 대단한 명예를 갖게 되어 신분 세탁이 가능한 사람이야 개정판을 거머쥘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난 대로 자란 대로 멈춘다.

 

모두 공평하게 어딘가 누래지고 약간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헌책이 될 뿐이다. 헌책이 더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모두가 헌책을 좋아하길 바란다. 헌책은 표지에 제목이 크게 쓰여 있어서 좋고, 이야기가 솔직하고, 투박하지만 정감 있고, 가끔은 사전을 찾게 만드는 고어가 맛있고, 요즘과 다른 낭만이 있음을 찾길 바란다.

 

얼마 전 나이 지긋한 손님들은 반존대를 좋아하니, 엄마 오늘 점심 뭐 드셨어? 같은 말투를 연습하라는 어느 사장님의 릴스를 보았다. 쿵쾅거리는 AI 녹음 사이로 실제 연습하는 종업원의 음성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을 왜 아는 사람처럼 대할까? 노인에 대한 호기심이 필요한 시대다.

 

사연 없는 책은 없다. 헌책방을 거닐다 보면 저마다 책들에 고랑이 깊다. 가끔 남의 고랑에 빠지거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펼쳐 접힌 구석을 빳빳하게 펴주는 것이 옳다. 젊은 너도 헌책, 늙은 나도 헌책. ⁴기껏 해봐야 모두 한 권의 책이라는 마음으로.

 


 

¹2019년 사이버 모욕죄 및 명예훼손 피의자 연령별 현황에 따르면 20대(28.91%), 30대(23.99%), 40대(18.32%), 50대(13.45%), 10대(9.31%), 60대 이상(6.02%)순이다. *자료:경찰청

²2026년 현재 유소년 인구는 9.7%이다. *자료:KOSIS

³1년 내외의 책을 신간으로 칭하며, 내용 변화가 심한 과학서, 역사서, 교과서의 개정이 활발한 편이다.

⁴뽑기 사건의 가해 학생들은 혼났을까? (요새는 부모가 혼내기 전에 자녀에게 혼나고 싶은지 물어본다던데) 뽑기 사건의 피해 할아버지는 혼났을까? (할머니가 단단히 바가지를 긁지 않았을까)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윤종신 - 우리 이제 연인인가요(with 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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