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정말 향기를 남겨. 옛말이 다 맞아.”
이츠키는 키오를 귀한 친구로 여겼다. 보아의 오랜 팬이기도 했던 그는 소문자와 대문자의 쓰임새 그리고 점을 사용해 대체할 수 있는 의미 체계에 대해서도 점잖게 타일러줬으며, 키스오브라이프의 줄임말은 키오프이며 키오라는 그녀들의 팬봉이란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츠키는 보아의 영문명을 정확하게 쓸 수 있었고, 어디 가서 “키오라 노래 진짜 좋다.”라고 말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둘은 테이를 음악캠프와 음악중심에서 모두 본 절친이다. 아니, 들었던 절친이다. 둘은 테이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음캠 때는 서둘러 논술 문제를 풀었고, 음중 때는 종로의 노상에서 소맥을 연거푸 들이켰다.
키오는 이츠키에게 상냥했지만, 가끔 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대상은 모두 이츠키의 연인, 언젠가부터 그들을 ‘썅것들’이라고 불렀다. 헤어진 다음 날 “썅것’을 들었을 때 이츠키는 화가 났지만, 한 달쯤 지나면 그렇게 불러주는 키오에게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둘은 종종 ‘썅것들’에 노래를 붙여 놀이를 하곤 했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썅것은 P였다.
이츠키는 삶의 모서리를 접고 접어 둥글게 만들어 P에게 맞추고 싶었다. 그날도 역시 그랬다. 달력의 날들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어 디데이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나섰다. 공영주차장에 들어가기 위해 30분, 부자피자에 가서 웨이팅 리스트에 올리는 시간 15분, 다시 한강진역까지 가는 15분이 걸렸다. 꾸준하기는 P도 마찬가지여서 늘 그렇듯 10분을 늦었다. 이 구절에서 키오는 늘 작은 노여움을 드러냈다.
“늘 늦어. 지가 푸틴이야? 여기가 인도야? 너 여름 휴가 때 걔 만난다고 대군가 대전인가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30분 동안 혹서기 훈련한 날 있잖아? 난 아직도 그때 너만 생각하면 한증막에 들어간 사람처럼 온 모공에서 눈물이 나와.”
대전도 대구도 아니었다. 경주였다. P가 뿔이 난 이유는 명확했다. 고속버스로 왔기 때문이었다. P는 데이트 내내 운전을 도맡아 하라는 은근한 압박, 지금까지 조수석만 탄 것에 대한 은유적인 벌로 느껴졌다고 했다. 이츠키는 경주 복합터미널앞 광장에서 받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걸었고, 30분만에 전화를 받은 P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스타벅스 통유리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츠키는 유리창 너머 P를 찾곤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키오는 당시 상황을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빌려 묘사하곤 했다. “네가 어떤 맘이었을지는 몰라도 말야, 내가 보기에 걘 완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 체결한 일본이랑 별다를 바가 없었지. 완전 징벌전.” 이츠키는 절반은 조롱이라 느꼈다.
경주에서 짧은 만남 이후 다시 데이트를 잡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손을 잡는 일이 어색할 만큼 마음의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예약해둔 부자 피자에선 예상치 못하게 뷰가 가장 좋은 자리를 받았다. 오랜 동네들이 그렇듯 굵고 높은 나무들이 뻗어 있었고, 한남동 일대가 변화하는 속도를 보여주듯 그에 못지않게 높은 철근과 콘크리트 구조물도 우뚝 솟아 있었다. P는 자주 창밖을 바라봤고, 이츠키는 고개를 떨구고 피자를 우걱 씹었다. 피자 한 조각을 오래 먹은 P가 습관처럼 피자 크러스트를 이츠키 접시 위에 올려놓곤 황급히 다시 가져갔다.
“아, 미안…이제 이러면 안 되겠지.”
피자가 반 이상 남았지만 아무도 포장하지 않았다. 나중 생각으론 그러길 잘했다 싶었다. 이별을 기념품처럼 들고 다닐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츠키의 마음은 한남동 거리처럼 소란스러워졌다. P가 좋아했던 써머레인 앞에 멈춰 섰지만 대면하고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맺고 끊는 일엔 영 자신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미 건물 앞에 선 것이 멋쩍어 2층에 새로 들어선 논픽션에 들어갔다. 여섯 개 남짓의 향수를 시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좋다, 싫다로 단순한 대답을 주고 받았다.
“그리곤 못돼 먹은 P가 너에게 선물을 했지. 왜 못 됐냐면 여섯 개 향이 들어간 디스커버리 키트를 사고선 네가 가장 고약하다고 했던 어텀리브즈를 톡 꺼내 선물이랍시고 너에게 줬으니까 말야.”
한강진역 플랫폼은 분주했다. 곧 도착하는 열차를 알리는 안내음이 울렸고, 사람들은 화살표에 맞추어 탑승할 준비를 했다. 이츠키는 자켓 주머니에 넣은 어텀 브리즈를 만지작 거렸다. 향수를 꺼냈고, 지하철의 문이 열렸다. P는 올라탔고, 손을 흔들었다. 이츠키는 대꾸 없이 닫히는 스크린 도어를 향해 향수를 한번 뿌렸다. 부풀려지는 P의 동공이 보였다. 참을 수 없는 역함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역사 쓰레기통에 달려가 얼굴을 처박곤 죽어가는 돼지처럼 구역질을 연거푸 쏟아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옥수역까지 올라갔다가 동호대교를 타고 걸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걷는 게 당연한 날이었다. 난간에 기대어 피카소 전에 가기 전날 밤의 마음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어딘가 묻은 낙엽의 비린내, 눅눅한 흙냄새가 뇌를 자극했다. 매스꺼웠다. 피카소의 삶을 외웠고, 후기 작품의 경향에 대한 설명을 여러 번 암송했던 밤이었다. 첫 번째 데이트를 앞둔 그 밤이 악취의 탑노트가 되어버렸다. P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후련했다. ‘내 사랑이 인질이었을까?’ 이츠키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단념한 듯 손을 뻗었다. 어텀브리즈는 한강으로 낙하했다. 엉킨 마음이 풀어졌다.
이츠키는 한동안 버켄스탁 아리조나와 플리츠 가디건과 얇은 끈의 흰색 민소매 그리고 어텀브리즈와 싸워야 했다. 지나갈 땐 숨을 꾹 참고 걸었고, 말을 걸어오면 벙어리가 되었다. 쇼핑몰에서 지하철에서 비행기 안에서 만나는 트리거는 이츠키를 자극하고 연상하도록 주술을 걸었다. 트라우마 앞에 무릎 꿇고, 머리채를 잡혔다.
“오늘의 술안주가 상당히 향기롭네. 닭발과 어텀브리즈. 단풍밭에서 무뼈 닭발이라…”
2차로 옮기면서 키오는 슬슬 혀가 고부라지기 시작했다. 이츠키는 주변을 살폈다. 디디가 합류하기로 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의 연애 끝에 향기 하나가 남아. 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그런데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연희동 한번 다녀오면 그간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는거야. 상탈 뿌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게, 어벤투스는 또 어떻고.”
디디의 살냄새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함께 샤워하는 날이면 이츠키는 디디의 몸에 바디크림을 발라주곤 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향을 뿜어내 놀란 적도 있었다. 이츠키의 몸에선 스파이시하던 것이 디디의 몸에선 포근한 향이 굴렀다. 그럴 때면 이츠키는 디디를 꼭 끌어안으며 “아, 좋다. 우리 하나가 되어볼까?” 애교를 부리곤 했다. 향이 없는 듯 코 끝을 스치는 이슬 아래 풀 냄새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몸이 촉촉해진 두 사람이 무릎을 포개고 앉아 서로의 하루를 쓰다듬었다. 점심으로 먹었던 팟타이, 선글라스를 쓴 고양이 그리고 삼겹살집 옆 장미. 이츠키는 디디와 연애를 시작하고서부터 통 흥미가 없던 사진 찍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진에 이르러 이츠키가 디디에게 어떻냐는 의미로 눈짓을 보내자, 디디는 이츠키의 두 뺨을 쓸어모아 놓고 말했다. “팟타이도 고양이도 장미도 존중하는 당신이 좋아. 예뻐 죽겠어.“ 가벼운 뽀뽀가 연이어 날아들었고, 이츠키는 디디의 품에 안겼다. 사랑하는 마음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에 이츠키는 감사했다. 그럴 수 있음은 늘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주는 디디의 다정함 때문이었다. 이츠키는 늘 고마웠다. 두 사람은 오늘 찍은 모든 사진을 간직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이츠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키오씨 오랜만이에요.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어서와요 디디, 내 구세주. 오늘 이츠키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막에서 피 나는 줄 알았어요.”
“오 그래요?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데요?”
“향기요. 디디가 지나면 참 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됐다. 무슨 향수 써요?”
“하핫. 고마워요. 저, 어텀 브리즈 써요. 지금은 닭발 브리즈지만.”
키오는 어깨를 으쓱, 이츠키는 찡긋 윙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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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퍼
오랜만에 올라와서 반가운 마음이에요😊
주석의 주석
감사한 마음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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