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애교

2025.08.18 | 조회 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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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에 홍색 꽃이 폈다. 거미는 건너편 가로등까지 정성스레 무늬를 뜨는 중. 불빛에 반짝이는 거미줄을 구경하다 그대로 끈적, 얼굴이 잡혔다. 여름은 이런 사소한 좌절을 끼얹곤 한다. 아깐 올리브유를 두르고 살구를 구워 먹으려다가 불과 씨름할 생각에 그만두었다. 무더위엔 먹보도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곤 살구 세 알을 주머니에 넣어 산책을 나온 참이었다. 새그러운 생살구의 맛에 대단한 여름밤 습기도 좀 가셨다. ‘이왕 씻을 테니 훼방꾼이 되어볼까?’ 두 팔을 선풍기처럼 휘둘러 거미줄을 다 끊어놨다. 아차, 벤치에 앉은 어린 커플이 놀라 서로 껴안는다. ‘이상한 사람 아녜요.’ 빙긋, 꾸벅하니 커플도 빙긋, 꾸벅한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이 붙는다. 금슬이 좋다. 자연을 보고 사랑을 배운다. 휴가를 알리는 종이가 카페 앞에 붙었다. 귀여운 이모티콘이 잔뜩 그려져 있다. 덩달아 들떠 나도 앞둔 여행을 상상해 본다. 걷다 보니 자꾸 모래가 밟힌다. 벤치에 앉아 쪼리를 벗고 발바닥을 탁탁 턴다. 올해도 엄지와 둘째 발가락 사이만 하얗다. 숨을 고르고 개천을 내려다보니 에키네시아가 꼭 이 다 내놓고 웃는 아이처럼 피었다. 향은 없는데 나비랑 새가 자주 오간다. 그 옆에 에어팟을 꽂은 청년이 꽃을 쓰다듬고 있다. ‘가슴팍 젖은 모양이 꼭 하트 같네.’ 미소가 수채화처럼 번지는 것을 보니 연인과 통화이려나 싶다. 집엔 듣는 귀가 많은가 수줍은 사랑을 속삭이러 나왔나 보다. 참 예쁘다. 쿨링포그 앞에선 아이들이 조잘대고 옆엔 여섯 대의 씽씽카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다. 부모들이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 옆으로 지친 러너가 숨을 몰아쉬더니 싱글렛을 벗어 땀을 꾹 짠다. 후발 주자들이 어깨를 탁 치고 손을 잡아당긴다. 러너는 기합을 외치고 내달린다. 자연 같은 사람들. ‘오늘도 열대야군. 샤워 하고 살구씨나 심어볼까.’ 무릎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Jordan Susanto - Ch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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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갭퍼의 프로필 이미지

    갭퍼

    0
    4 months 전

    여름의 한 장면 장면들이 왠지 소중해지네요ㅎ 무더운 여름 잘 보내세요 작가님!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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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오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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