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이불 삼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쳐보지만, 눈동자는 점점 말똥해졌다. 금밤이 조신하니, 토요일 아침까지 신체 리듬이 주중으로 맞춰졌나 보다. “으악! 이렇게 뒹굴 시간에 수영이나 가야겠다!” 어쩌다보니 오늘도 씻수하러 가게 되어버렸다. 얼마 전 중급반 승급 기념으로 지른 수영복을 가장 먼저 챙겼다. 앞뒤로 노을 지는 산타모니카 해변이 그려진 수영복이다. 막 수영을 시작했을 즈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정말 좋은 운동이야. 아마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걸?” 정말 그랬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산타모니카 수영복을 입고 물살을 가를 날이 방금 버킷리스트에 추가됐으니 말이다.
처음 샀던 수영복은 나이키 재머였다. 튀는 것이 싫고 신체 노출을 꺼렸던 내게 네이비 색상과 4부 기장은 딱 좋은 옵션이었다. 신규회원이 입장하는 날, 준비체조 시간에 주변을 스캔해 보면 신규 회원과 기존 회원을 얼른 구별해 낼 수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검은 해녀복을 찾으면 얼추 맞는다. 영국에선 운전 연수 차에 ‘Learner’ 마크를 붙인다던데, 비슷한 징표였다. 상급반으로 눈을 돌리면 졸린, 펑키타, 풀타임… 화려한 패턴에 과감한 컷팅이 매력인 수영복에 정신이 팔리게 된다. 사실 수영복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까딱하면 숨이 넘어가거나 물배 불러서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인데, 남 수영복 궁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비기너에겐 조금 더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 마음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할 것이고, 그것들이 어지럽게 섞여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랬던 하루의 도전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상냥하게 대답해 드리고, 앞지르지 않고, 발바닥을 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 수영은 심리적 장벽이 높은 운동이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공기가 아닌 물 속이며, 사계절 내내 체온 조절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하루 강습 받고 환불하는 회원님이 없도록 상냥한 선배가 되기로 다짐한다.
올 초, 문체부는 주 1회, 30분 이상 규칙적인 체육활동을 하는 생활체육인이 61.2%라고 밝혔다. 생각보다 높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30대 인구의 생활체육 참여율은 작년에 비해 7.8%나 상승했다고 하니, 단연 기쁜 소식이었다. 건강 관리 겸 여가 선용 겸 행복한 삶의 성취로 운동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경우엔 새로 산 수영복을 입을 겸 샤워도 할 겸 수영장에 왔다고나 할까? 아침 9시 30분, 이미 모든 레인은 물 반 사람 반이었다. 아침 기온 5도인 날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나처럼 아침잠이 없나?’ 늘 마주치는 수친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그야말로 효자 종목이었던 수영! 우리나라의 수영이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룬 데 수많은 이유가 쏟아졌다. 그중에서 생존 수영이 교육과정에 포함된 효과라는 분석이 눈에 띄었다. 비슷한 경우가 하나 더 있다. 수영인의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경우도 1955년 잇따른 해양 사고 이후 국가적으로 안전 수영을 장려하고 있다고 한다. 90% 이상의 초등학교에서 수영장을 보유하고 있고, 임용고시 과목으로 경영이 개설되어 있다고 하니 생존으로서 수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4학년 담임을 맡았던 몇 년 전, 생존수영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인솔했던 적이 있다. 비렸던 락스냄새, 아득하게 느껴졌던 1.2m의 수심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실내 수영장을 처음 가 본, 수영을 하지 못하는 선생님이었다. 만약 그날에 반 아이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소리쳤다면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살면서 물이 무섭지 않았던 기간은 올해 3월부터 11월까지, 9개월, 딱 9개월뿐이다. 물에 뜰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고, 슬그머니 목표 하나를 새겼다. 아이들을 가장 빠르게 구할 방법, 인명구조요원이 되자! 또 하나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자수에선 강사님이 계시지 않아 남들과 비교하기가 쉽다. 그래서 기본에 충실해지자,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자, 다짐하곤 한다. ‘허벅지로 발차기! 시선은 45도 아래! 어깨에 긴장 풀고 유연하게 글라이딩!’ 쉬지 않고 250m를 돌고 나니 수모 안이 뜨거웠다. 숨이 가빠오고 콜록 기침이 쏟아졌다.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우아하게 턴하시고, 유연하게 배영으로 물살을 헤쳐 나가셨다. 수면 위로 탱탱볼을 차는 것 같은 가벼운 킥, 리듬체조를 보는 것 같은 어깨와 팔의 조화로운 움직임, 흔들림 없는 꼿꼿한 시선 처리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교본이었다.
이탈리아 말로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을 아주 쉽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해내는 장인을 두어 ‘스프레차투라’라고 칭송한다. 최고의 능력을 얻기까지 겪었을 고통스러운 연습, 번뇌의 시간까지 모두 포함하여 존경을 보내는 표현이다. 자유형에 이어서 250m는 평영으로 돌았다. 손과 발이 뒤엉키는 통에 동작이 뒤죽박죽이었다. 성미가 급한 데다가 박치인 터라 콤비로 해내는 일은 항상 어렵다. 멀티가 안 되는 것은 물 안이나 밖이나 똑같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계속, 계속, 계속했다. 스프레차투라로 나아가기 위한 데코로의 킥, 킥, 킥으로!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씻수 : 씻으러 가는 수영
*자수 : 자유수영
*수친 : 수영 친구
*수태기 : 수영 권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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