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이요.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하니 “5분만 기다리쇼잉.” 하는 주인. 오후 6시 30분, 저녁 식사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5분 만에 자리가 날까?’ 싱글벙글한 주인은 우리 가족을 남기고 테이블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는 못 본 새 관상이 좋아졌다며 단골에게 기분 좋은 농담을 던지고, 모자란 반찬을 재빠르게 채웠다. 주인을 관찰하는 동안 줄이 늘었고, “5분만 기다리쇼잉.”은 계속되었다. 그때였다. “어머, 자리가 났네. 진짜.” 놀랍게도 5분만 기다리면 모든 손님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워매 뭘 더 머그야. 우리는 솔찬히 먹었응께 고만 일어나게~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야?”하는 소리를 몇 번 듣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웨이팅 지옥 속에 사는 수도권 사람으로서 제시간에 식당에 입장하는 것은 일종의 로또였고, 창문 너머 웨이팅 인원과 눈이 마주치면 당첨자로서의 여유로운 미소 싱긋 후 남은 식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국룰이었다. 허나 전국 1등 홍어 요리 전문점, 홍어천국은 달랐다. ‘선~서! 토요일 저녁에 홍어를 즐기러 온 홍어 동지들에게 호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유지한다!’
서울은 전국의 향토 음식을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냉면계의 양대 산맥인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전국 맛 지도만 살펴봐도 금세 수긍할 수 있다. 다만, 향토 음식은 지방의 기후나 전통에 따라 발전해 온 터라 마음속으로 ‘서울식’을 붙여야 한다. ‘서울식 장칼국수’, ‘서울식 헛제삿밥’ 이렇게. 맛을 내는 데는 사용하는 재료,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 조리하는 순서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먹는가도 음식 맛에 큰 몫을 차지한다. ‘아따 그람 그렇지.’ 홍어 천국의 산지 직송 삼합도 고향 집 마루에 앉아 얼큰한 탁주 놓고 먹는 산지 홍어 맛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코 깊숙이 들어와 전두엽을 딱 치고 나가는 삭힌 맛이 약하고, 예쁘장하게 썰어내니 턱을 삐죽거리며 씹는 재미도 덜했다. 고깃값이 비쌌던 옛날, 고기를 덜 먹고자 맛이 풍부했던 김치와 홍어를 함께 먹던 문화가 홍어삼합이었다. 유래를 생각해 보더라도 슴슴한 홍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게 안은 행복한 꼬랑내로 가득했다. 마치 ‘서울식 홍어삼합을 먹으면서 전라도 어디께 상상 여행 팟 구합니다.’ 공지 보고 모인 사람들 같았다.
시골집에서 시어머니 병시중, 시아버지 식사 수발을 들고 온 엄마는 홍어를 먹으면 힘이 날 것 같다고 했다. ‘홍어는 관절 기능을 개선하고, 소화 기능이 좋아지도록 돕는다.’고 위키백과에 나오기는 하나 보통의 사람들이 자양강장제 대신 홍어를 먹지는 않는다. 홍어오백, 홍어차…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쌈 위에 수육, 홍어, 묵은지를 순서대로 올리는 엄마의 젓가락질이 흥겨워 보였다. 아빠는 홍어를 상추처럼 사용했고, 금세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입맛이 없을 때 고향 음식을 먹는 일은 추억의 재현일까, 상실 앞에 잠시 눈을 가리는 일일까? 아흔을 바라보시는 할머니는 부쩍 마음이 약해지셨다. 10월의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둘째야, 이러다가 네 엄마 딱 죽게 생겼다. 누워만 있다. 몇 날 며칠을.”이라고 하셨다. 그날의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아빠의 목은 메였고,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이 대신 몇 마디를 이어주었다. 아빠는 아쉬워 보이기도, 억울해 보이기도, 내가 짐작도 못할 표정을 지었다. 묵묵하게 홍어를 씹어 넘기곤 “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찬송가가 있어. 전활 걸어 우리 엄마랑 그 노랠 같이 부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목까지 울음이 차오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딱 알겠더라니까.” 하며 소주 한 잔을 삼켰다.
마침 ‘홍어 애’가 들어온 날이었다. 애는 홍어 부속 중 가장 고소하고 식감이 부드럽다. 생긴 것만 보면 상한 것이 분명한데, 괘념치 말고 일단 먹어보면 ‘애간장을 녹이다.’라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딱 든다. 내장을 숙성하는 건 정확한 기술이 필요한 일인데, 역시 전국 1등이었다. 쌀국수 가게는 길마다 있지만 홍어 가게는 찾기 힘들다. 그 와중에 홍어 애를 먹을 수 있는 곳? 아마 서울에 얼마 없을 것이다. 귀한 홍어 앞이라 그런지 가게 안 어떤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애당초 취할 만큼 마시지 않았다. 홍어를 애호한다는 것은 일면 맛잘알인 셈이었고, 더욱이 홍어팟에 참여해 준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술은 정말 반주일 뿐이었다. 사실 가족 식사를 앞두고 예약해 둔 곳은 레스토랑이었다. 흐드러진 단풍 숲 아래 위치해서 가을 나들이까지 가능했던 곳, 파스타와 라쟈냐를 제법 잘하는 가게, 화장실 딸린 조용한 룸을 치열한 예약 전쟁에서 거머쥐었다. 하지만 식사 전날 가족들 시간이 어긋나는 바람에 예약을 취소하게 되었고, 얼마의 위약금까지 물자 괜한 짜증이 나기도 했다. 2트였던 홍어천국이 겁나 허벌나게 좋아부릴지 모르고 말이다. ‘거시기 뭐시당께. 전화위복이라 안 허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오리탕을 꼭 끓어 주셨다. 작년에 털어 곱게 간 들깻가루를 한 숟갈 푹 떠서 국물에 넣으면 들깨죽 같았다. 아니 보약 같았다. 평생 잊지 못할 풍미였다. 푹 삶아 부드러운 오리고기 큰 놈 위에 부추무침을 가득 올려 입에 넣으면 밥 두 그릇이 뚝딱이었다. 할 것도 없는 시골에서 이틀이나 있어야 한다며 오리주둥이처럼 입을 대빨 내밀곤 했지만, 할머니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입이 행복했다. 그 오리탕을 먹지 못한지 삼 년이 되었다. 자주 해주시던 모싯잎 송편도, 보리 식혜도 그즈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알아채지 못하였지만, 할머니는 천천히 쇄약해지고 계셨을 것이다. “이제 올라오셔서 형제들이 돌보면 어때? 돌보는 사람들 입장도 생각해야지.” 속 편한 생각이었다. 일산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대전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노부부가 맞이할 도시는 키오스크와 노시니어존으로 범벅일 터였다. 대책을 궁리하는 동안 톡 쏘는 홍어만이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홍어활명수는 의외로 먹을 만할지도?’ 마지막 코스는 홍어애탕이었다. 고소하고 시원한 것이 어우러져 묘한 감칠맛을 내었다. 미미였다. 삼합 대, 애 한 접시, 애탕 중 어떤 메뉴도 자발적 선택 없이 이모님이 먹으라는 대로 먹었지만 무엇 하나 실패가 없었다.
20세기 초, 나폴리 사람들은 가난을 등지고 드림스컴트루를 외치며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고 한다. 정착하여 자녀를 낳고 손주를 맞아 대가족을 이루었고, 크리스마스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선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일곱 생선 만찬’이다. 대구, 오징어, 문어, 굴… 다양한 생선을 다양한 요리법으로 만들어 내는데, 요즘엔 일곱 가지를 넘는다니 그들의 경제 사정이 꽤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우리 가족에게 홍어천국은 ‘일곱 생선 만찬’을 내어주었다. ‘전국 1등’, ‘전문’, ‘천국’까지 숨 몰아쉬며 말해야 하는 수식어의 상호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한 시간 반이 정도 흘렀을까, 사장님이 분주하게 테이블 사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산하니 “아따 맛나게 드셨소잉?” 하면서 민트 껌을 내민다. 사장님 반응이 궁금해서 “하나 더 주시면 안 돼요?” 해봤더니, 익살맞게 “인당 하나랑께요.” 한다. 잠시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처럼 딱 5분 기다린 손님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가게를 나왔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살펴본 영수증엔 ‘01. 삽합대 59,000 / 02. 홍어애탕(중) 30,000 / 03. 애 10,000…’이라고 쓰여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이 무슨 식인 문화인가 싶은 영수증을 보며 다시 웃었다. “아이고, 오늘 애 먹길 잘했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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