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4,500원이나 하는 브리오쉬를 사 먹을 땐가? 그 옆에 3,500원짜리 카스테라를 먹었어야 내 형편에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갑작스레 전세 오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주인과 실랑이 끝에 이천만 원으로 합의를 본 것이 어제였고, 일정 비율만 증액 가능하다는 은행원의 설명을 방금 들은 참이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변동금리로 설정해둔 전세 대출은 6개월 주기로 펄쩍 펄쩍 뛰었고, 생활 물가는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나름의 자이언트 스텝으로 문화비부터 삭감했다. 분기마다 여러 다발 사서 주변에 나누고 집을 장식하던 꽃 놀이를 그만두었고, 제한 없이 수집하던 책 놀이도 당분간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중고 서점에서 사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돈’에 관해선 나이브한 태도를 꼿꼿이 유지해와서인지, 생애 최초로 돈이 없어서 서럽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던 올해 봄, 한 기업에서 교사들에게 예스24eBook 1년 이용권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서관의 신착도서들이 마지막 3번 주자까지 풀부킹인 상황에, 노원으로 잠실로 대학로로 힘들여 중고책을 찾아다니는 일에 지칠 무렵이었다. 미룰 이유 없이 당장 가입했다. 첫 전자책으로 취미수집가의 일상을 담은 황지혜 작가의 ‘호비클럽으로 오세요’를 골랐다. 싱그러운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²전자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매끄러운 것들의 집합 중 한 원소였다. 검지의 가벼운 터치로 넘어가는 장과 장의 연결이 기술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50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디스플레이에 대한 경계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사진이며 글을 자꾸만 캡처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용하는 종래의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종이책이었다면 줄을 치거나 필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어떤 행동이 ‘소유’의 본질에 더 가까울까?
촉각을 동원하는 호사는 종이책을 읽을 때만 누릴 수 있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10포인트의 조각상을 다루듯 무진장 쓰다듬던 때도 있었는데,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글자의 조합’ 혹은 ‘출렁이는 갈기의 역동적인 흐름’은 ‘말’이라는 글자의 뜻을 촉각으로 설명하기 충분했다. 전자책의 매끄러움과 종이책의 사각거림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엄지와 검지의 협응으로 오른쪽 페이지를 살짝 쥐어 넘기는 쾌감, 종이책만이 가능하다.
곧 전세 재계약이 다가오고 있지만 세계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려 있는 주식과 얇아진 지갑에 한숨이 폭 나온다. 그럼에도 넘기는 쾌락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한 달에 한 권은 읽고 싶은 신간을 구입하기로 정했다. 맘껏 줄치고 메모하리라. 나다운 스몰스텝을 떼려고 한다. ‘꽁돈 생겼다고 옷 사 입고 술 사 먹나 봐라, 시집 사지.’
¹어여쁜 궁녀 ‘소화’는 하룻밤 성은을 입어 왕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왕은 그날 후로 그녀의 처소에 들지 않고, 소화는 ‘왕이 드나드는 길 담벼락 밖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그리움에 사무친 죽음을 맞이한다. 소화가 묻힌 자리에 피어오른 꽃을 ‘능소화’라 불렀다. 업신여길 능, 하늘 소, 꽃 화. 능소화는 한여름의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들어 피어난다.
²초독은 종이책, 재독은 전자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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