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밉지 않은 불 타입 포켓몬 시연에게

시연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2021.07.10 | 조회 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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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안녕, 시연아. 나는 한가한 일요일 낮, 비건 스콘을 파는 연희동 카페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어. 편안한 음악이 나오는 아늑한 공간에서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있자니 내가 글을 쓸 수 있을지 덜컥 두려워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글이 쓰고 싶어져. 그래서 편지를 쓰러 왔어.

지난주에 나는 제주도에 다녀왔어. 작년에 갔을 때는 태풍 바비가 섬을 휩쓸어서 우비를 쓰고 가까스로 걸어 다녔는데, 이번 여행은 볕이 환하고 날씨가 참 좋았어. 지금 보니 손등과 팔이 까맣게 탔네. 곳곳에 만개한 제철의 수국을 만끽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도 찾아다녔어. 나는 잘 가꾸어진 공간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 카페를 찾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서울에 있는 카페들은 공간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아쉬울 때가 많았거든. 그래서 정원이나 바다를 끼고 공간을 널찍하게 활용하고 손님이 지나치게 북적이지 않는, 제주도라서 가능한 공간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즐거웠어. 

다시 인사할게. 며칠이 지난 지금은 금요일 낮이야. 연재고 섬이고 글에 대한 부담을 다 내려두고, 오늘은 그냥 너를 생각하며 내 생활을 전하는 편지를 쓰려고 해. 이번 주에 나는 읽고 싶던 책을 사서 읽었고, 사놓고 구석에 두었던 시집들을 꺼냈고, 사람들을 만나고 꽃을 선물했어. 여름방학 근로를 하며 점심시간마다 근처 카페들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어. 어제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예쁜 소품샵을 발견해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목요일만 운영하는 곳이더라고. 일주일에 일곱 시간 문을 여는 가게에 지나가다 운 좋게 들어간 거지. 가게를 구경하다가 물감으로 파도의 색감과 질감을 표현한 투명 가방을 충동구매를 했어. 파란 옷을 입고, 이 파도 가방을 매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정말로 먼 지역에 갈 일이 생겨서 왕복 서너 시간 정도를 다녀왔지 뭐야. 거기다가 4dx로 심야영화도 봤어. 그리고 오늘은 창밖으로 나무가 그림처럼 푸르른 붉은 벽돌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어. 저녁에는 과외를 가야 하고, 친구들과 온라인 영화 상영회를 열 거야.

종강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 언뜻 평온하고 잔잔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수면 아래로 절박하게 물갈퀴질을 하고 있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며 살아가고 있어. 내 편지를 받아 읽고 부끄러운 마음에 웃었다는 시연아, 나도 네 편지를 읽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어. 첫 번째는 내게 따지고 들며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는 너의 솔직한 마음을 읽고 웃었고, 두 번째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읽고 웃었어.

풀 타입 포켓몬은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식물은 도무지 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다급과 초조, 불안 같은 것들로 꽁꽁 뭉쳐 만들어진 생물이거든. 게으르긴 하지만 느긋하진 못하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오히려 한껏 허세를 부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괜찮아, 별거 아니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바깥에 큰소리를 뻥뻥 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뻔뻔하게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못 되니까 의식적으로 부러 더 크게 소리를 치는 거야. 그렇게 허세를 부리다 보면 뻥뻥 친 큰소리가 진짜로 그럼직한 사실이 되기도 하잖아.

저돌적이고 욱하는 성질이 종종 튀어나와 불 타입 포켓몬이 될 것 같다는 시연아, 네가 저번 편지에서 이야기했던 도루묵 씨는 사실 새로운 시리즈가 계속 나오면서 점차 일자리를 잃었다는 걸 아니? 저장하지 않고 전원을 끄면 다음번에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도루묵 씨는 이제 자동 저장 시스템이 생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기회를 잃게 되었어. 긴급 탈출 서비스로 이직을 했다나. 사실 소리를 지르던 이전의 도루묵 씨도 미운 정 때문인지 나름의 팬층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네가 다듬고 싶다고 했던 네 안의 불도 나름의 매력을 구성하다가 시나브로 다듬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너는 그럴 수 있을 사람이라 감히 생각해.

오늘 우리의 지난 편지들을 읽으려 메일리에 들어갔다가 커피와 함께 우리 편지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와 있던 걸 확인했어. 익명인 줄 알고 평소보다 다정하고 낯간지러운 말들을 해준 그 친구의 메시지를 읽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기운이 났어. 덥지만 대신 어딜 찍어도 화보처럼 나오는 칠월의 날씨, 둘러보면 곁에 있어 주는 다정한 사람들(관계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그럼에도), 곳곳에 숨어있는 멋진 공간들, 방학이라 이제 줌으로나마 매주 만나게 된 애정하는 독서 모임, 어느 지점에서 숨을 잠시 멎게 하는 시집들, 제철을 맞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나는 카페인에 약해서 늘 연하게 오전에만 마셔) 같은 것들이 요즘 나를 살게 해. 지루하면서도 버거운 하루하루를 매일가까스로, 얼렁뚱땅 살아내는 중이야.

여름에 입맛이 없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난생처음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야. 배는 고프고 기력은 없는데 무얼 먹어야 할지 도통 아무것도 끌리질 않는 거야. 특히나 아직 비건으로 살아가기 아주 힘든 현실에서는 애초에 선택지부터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도 하고. 사는 게 참 녹록치 않다, 그치? 이번 편지에서는 유독 내 이야기를 잔뜩 했네. 이제 너에게 바톤을 넘기고 편지 마감이 없는 한 주를 한숨 돌리며 잘 보내볼게. 늘 그렇듯, 잘 먹고 잘 자기를 바라.

 

2021년 7월, 

한껏 허세 부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신희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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