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무가 아니어도 괜찮은 신희 언니에게

9주, 신희 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2021.07.17 | 조회 698 |
0
|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잘 지내? 언니의 편지를 받고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일주일이 흘렀네. 내 일상을 전하자면 요즈음 나는 괜찮기도 하고 안 괜찮기도 해. 주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일에서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있어. 실은 지난 편지에서 지레 겁을 먹기보다는 별거 아니야’, ‘괜찮아이런 말을 되뇌며 한껏 센 척을 하는 중이라는 언니의 말에 손바닥만 한 작은 앵무새의 모습이 떠올랐어. 몸집이 작은 앵무새들은 겁을 먹으면 자신의 몸을 커 보이게 하려고 깃털을 세우며 몸을 부풀리는데, 그럼 정말 물을 먹은 스펀지처럼 앵무새의 몸이 둥글게 커지거든. 하지만 그 모습이 원래의 크기가 아니라 있는 힘껏 몸을 부풀린 거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 자기 자신보다 커지고, 또 자기 자신보다 강해지려는 작은 앵무새의 노력도 좋지만 나보다 더 강한 척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부담을 덜어도 되지 않을까. 괜찮다는 말을 조금은 줄여도 괜찮다고, 나는 요즈음 이렇게 생각하는 중이야. 결국 무서움과 피로를 느끼는 것도 그만 나아가도 된다고, 조금은 쉬어도 된다고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던지는 싸인이 아닐까.

실은 일상의 장면으로 채워진 지난주 편지를 받고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 듯했어. 내가 말하는 원점이란 닌텐도 게임 속 도루묵 씨처럼 말짱 도루묵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야. 우리의 연재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놓고 서로 호흡을 맞추어가는 하나의 기획이었다면, 긴 여정 중에 잠시 숨을 돌렸다가도 이제는 그 도착지를 향해 바삐 걸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껴. 언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나는 그래. 사람들은 항상 결말을 궁금해하니까. 결말을 향해 성황리에 달려온 작품일수록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이 커져 있기 마련이고. 해리포터처럼 흥행에 성공한 시리즈물 영화는 마지막 시리즈를 1부와 2부 둘로 나누어 제작하기도 하잖아. 말하자면 나는 지금 그 섬에 갈 수 있을까의 마지막 시리즈 1부를 적는 중인 거야. 마지막 시리즈의 2, 그러니까 마지막 시리즈의 마지막 화에 대한 부담은 언니에게 슬쩍 떠넘기면서 말이야.

어느덧 바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차는 한여름이야. 언니와 연희동에서 처음 만나던 날처럼 푹푹 찌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어. 뜨거운 햇빛이 어지럽고 버거우면서도 또 한편으로 이 계절은 항상 나를 어디로든 떠나고 싶게 해. 어릴 적에는 한여름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던 기억이 있어. 찌는 듯이 더운 한낮이어도 귀가 먹먹하도록 요란한 물줄기 옆 바위에 걸터앉으면 그렇게 시원하고 안락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가도 어린 나는 잠자리채로 짓궂게 물속의 송사리를 잡거나 사금을 캐겠다며 물가의 돌을 깨다가 손을 다치고는 했어. 이 모든 것들이 코로나 때문이든 가족들이 각자의 일에 몰두하느라 바빠진 것 때문이든 이제는 전부 한여름의 꿈 같은 일이 되어버렸네.

사람들이 섬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뭘까 고민했어. 우선은 지루한 일상의 풍경으로부터 멀어져 비일상적 공간에서의 특별함을 즐기고 싶기 때문일 거야. 동시에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고립되고 싶어하는 욕망이라 생각해. 즉 비일상과 고립이란 일상을 둘러싼 수많은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그리고 사적이거나 공적인 관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일 거야.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외부의 것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혼자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말을 하려면 말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하듯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소개하려면 청자가 필요하고 타자가 필요해. 나에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이 편지의 수신인인 언니처럼.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를 의지하고 있는 거야. 이러한 존재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게 될 때, 때로 섬에 혼자 표류하기도 하고 또 섬과 섬 사이를 수영하기도 하는 우리는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연결된 대륙이 아닌 단독의 섬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없듯이(“No man is an island”) 모든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동시에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로서의 을 가꾸며 살아가. 그럼 우리는 그 에 갈 수 있을까? 혹은 사람들 사이를 잇는 에 갈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 질문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아. 편지를 통해 시험이라도 된 마냥 답안지를 적어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결국 완결된 고민은 없고 지나간 고민만이 있을 거야. 내가 너의 에 놀러 가도 될까? 제주 한 달 살기가 유행이듯이 잠시 너의 에서 함께 살아도 될까? 내 삶의 장면 속에서 이런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때는 깜짝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고민을 마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지나간 고민 중 털어버려야 할 고민과 간직해야 할 고민이 있다면, 우리가 10주간 던졌던 것들은 나에게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해.

언니는 어릴 적 사진을 구경하는 걸 좋아해? 어릴 적에는 부모님의 카메라가 귀찮고 싫었는데, 정작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때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건지 나는 종종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앨범에 든 어릴 적 사진을 구경하고는 해. 우리의 연재도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어. 구도가 조금 엉성하고 어색해 보이더라도 푸릇푸릇하고도 따뜻한 위로를 가져다주는 어릴 적 사진처럼. 2021,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10주간의 기록으로.

앞으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번 10주간의 연재 경험을 슬쩍 언급할 수도 있겠지. 편지가 모여 있는 웹페이지의 링크를 알려주면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고 말이야. 그리고는 겸양인지 진심인지 나조차도 알아차리기 힘든 부끄러움을 내비칠 거야. 그래서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랑은 어떻게 지내요? 아마도 이런 질문이 이어질 거고 그럼 나는 서간문 연재의 후일담을 풀어가겠지.

연재를 마친 후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건 내가 언니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마지막 편지인데, 생각해보면 마지막 편지라는 말이 참 웃겨. 연재가 끝나면 서로에게 편지를 쓰지 말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연재가 끝나도 학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알고 지낼 텐데 말이야. 언니는 풀 타입 포켓몬은 되어도 나무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내가 잘못 짚었구나 싶었어. 언니가 나무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러니까 오랜 시간이 흘러 찾아가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심지가 굵고 단단한 나무가 아니어도 괜찮아.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일과 새로운 관계에 동분서주하며 이곳저곳을 쏘아 다니느라 바빠질지도 몰라. 그때는 서로를 궁금해하는 일을 쉬어가게 되겠지. 하지만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2년 전의 여름 그리고 올해의 여름은 나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거야. 한여름의 계곡에서 즐기던 청량한 바람이 기억되듯이 그렇게.

나는 밤에 종종 한강 공원을 산책하는데, 보행로 옆으로 자전거 도로가 나 있어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해. 사람들은 보호 장비를 갖추고 빠른 속도로 페달을 밟아가며 서로를 스쳐 가. 그들의 모습은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시절 연인들의 모습 같기도 해. 언니가 지난 편지에서 관계의 수명을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혹은 시간이 흘러 예전 같지 않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스치는 과정에서 다치지 않도록 방어기제를 보호 장비처럼 온몸에 둘러. 오늘도 나는 나와 타자의 방어기제를 알아가고, 변함이 없는 나의 방어기제가 따분하다고 잠시 생각해.

그게 관계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모든 것에 수명과 시절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오늘의 나는 나를 지켜주는 것들이 생동하는 이 한여름에 환희를 느껴. 인연이 다했을 때 그들을 보내줄 수 있는 용기는 나아가 그들이 떠나더라도 이어서 새로운 것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줄 거야. 이렇게 믿으며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해볼게. 더위 조심해.

 

2021 7 17 일 오후

하루건너 호우주의보와 폭염주의보가 내리는 날씨가 괜찮지 않은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