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 계획이 있었던 신희 언니에게

7주, 신희 언니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2021.07.03 | 조회 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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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지난주 이맘때, 버스 안에서 언니의 편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실실 웃어버렸다는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해볼까 해. 날 웃게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그건 바로 나를 펜팔 두더지라 불러 준 것 때문이었어. 언니가 편지에서 밝힌 동물 이웃들과 섬에서 생활하는 닌텐도 게임이 뭔지 알고 있어. 나도 한 10년 전 즈음 옛날 시리즈의 그 게임을 종종 즐기곤 했는데, 저장을 안 하고 닌텐도 전원을 끄면 다음번에 게임을 실행했을 때 항상 집 앞을 나서자마자 두더지 캐릭터가 나와서 앞을 막아서더라고. 그 두더지 캐릭터의 이름은 도루묵 씨였던 걸로 기억해. 실컷 게임을 해 놓고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의미인 건지, 아무튼 이 도루묵 씨는 저장을 안 하고 전원을 끈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잘못했어따위의 대답을 받아내고는 했어. 도루묵 씨에게 시달리는 일은 불쾌하고 피곤하기 짝이 없었어.

펜팔 두더지라는 말에 도루묵 씨가 떠올라서 부끄러웠어. 언니의 지각에 연재 전에 검토가 필요하다며 다급한 마음에 모종의 독촉을 했던 도루묵 씨 같은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거든. 유하게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언니에게 따지고 들면서 미안하다는 대답을 받아내야겠다는 속마음이 조금은 있었어. 뭐가 그렇게 급하고 걱정이 되었던 건지. 약속한 기한을 지키는 게 아무래도 이상적이지만 마감에 쫓겨서 억지로 쓴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 나 또한 이번 편지를 우리 둘이 정한 기한보다 늦게 언니에게 보내기도 했고 말이야. 두더지라는 단어는 정작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는데, 막상 언니의 편지에서 그 단어를 다시 마주하니 게임 속 도루묵 씨가 떠오르면서 바늘처럼 나를 콕콕 찌르는 거 있지.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언니의 지각한 편지를 읽어나가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어. 언니는 다급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했지만, 편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언니의 머릿속 생각들에서 편안한 진솔함이 느껴져서 좋았거든. 종강한 기념으로 진짜 섬에 놀러 간다는 언니는 여행에도, 글에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어떻게든 우리는 연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고.

놀러 간 섬은 어때? 마음에 들어? 무엇을 먹고 또 어디를 들렀는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사람이 너무 많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시가 정현종 시인의 시 외에 또 있는데, “No man is an island”라는 존 던의 영시야. 종강을 앞두고 나는 두더지처럼 열흘을 숨어 지냈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통해 만났던 타인들과 밤새도록 함께이기도 했어. 나는 혼자였지만 결국 혼자가 아니었고, 아니 혼자일 수 없었고 타인과 나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어. 사람은 외딴 섬으로 떠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기도 하고, 또 종종 자신의 섬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도 해. 온전히 고립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타자는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불가결한 매개자라고 말하듯 자신을 인식하는 건 필연적으로 타자를 경유함으로써 이루어지니까. 나와는 다른 세계, 다른 자의식, 다른 생을 살아가고 있는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나를 바라보게 되고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잖아. 각자의 섬을 상상하고 질문하며 서로에게 다가가기도, 조금 비켜서서 거리를 조정하기도 하는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기도 하겠지만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

그 와중에 풀 타입 포켓몬이라는 표현이 언니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식물은 사람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 햇빛과 땅에서부터 자양분을 얻으며 물을 마시고 자라나는 생명체라니, 이렇게 평온하고 무해한 존재가 또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건 칭찬이야. 연약해 보이지만 안에는 해를 거듭할수록 단단해져 온 심지를 품은 사람.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계절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휙휙 그것들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 이파리를 살랑거리듯이 섬세한 몸짓과 말의 결을 가진 사람. 나이가 들어 찾아갔을 때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인 동시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해.

오늘따라 은유적인 말을 많이 하네. 그렇지만 굳어진 관용어나 관념어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하나의 질문을 놓고 빙빙 돌고 있는 우리의 편지처럼 말이야. 만능열쇠 같은 명징한 해답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순간, 우리의 질문은 시간 내에 답을 적어내야 하는 성가신 숙제가 아니라 지니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고민거리가 될 거야. 유쾌하고 편안했던 만남은 항상 오래 기억되는 질문을 남기고 마음을 풍족하게 하더라고. 나는 언니와 연재를 함께하며 섬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 기간이 퍽 즐거워.

내가 포켓몬이 된다면 풀 타입 포켓몬은 못 될 것 같고 아마 불 타입 포켓몬이 되지 않을까. 나는 언뜻 차분해 보이면서도 내면의 저돌적이고 욱하는 성질이 튀어나올 때가 있고 사고도 종종 치거든. 이런 내 안의 불을 은은한 새벽의 촛불로 가꾸고 싶어. 나에게 온정과 울음이 있다면 그 쓰임새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하는 데에 있다고 믿어. 오직 나만을 가여워하던 자기연민을 넘어서 나보다 더 큰 슬픔과 아픔에 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또 타인이 필요해. 허락해준다면 그들의 섬에 가 보고 싶고, 결국 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군도가 보이지 않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싶어. 언니가 말한 닌텐도 게임처럼, 나무에서 배가 열리는 섬의 사람과 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는 섬의 사람이 만나 잘 익은 과일을 나눠 먹는 장면을 보고 싶어. 언니는 과일을 좋아해? 좋아한다면 혹시 무슨 과일을 제일 좋아해? 나는 여름이 제철인 딱딱한 백도 복숭아를 제일 좋아해. 어릴 적에는 복숭아 농사를 지으시던 친할머니댁에 놀러 가 복숭아를 배부를 때까지 양껏 얻어먹고는 했어. 이번 여름에 집 근처 청과 시장에 들러서 맛있는 복숭아를 골라 올 생각을 하니 벌써 미소가 지어져.

요즈음 나는 공부를 핑계로 미뤄두었던 친구들, 지인들과의 약속에 부지런히 나가는 중이야. 내 주변의 타인들, 그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어. 사람이라는 존재는 들여다볼수록 어쩜 이리도 깊은지 모르겠어. 그렇게 추악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사람의 입체감과 수많은 표정을 알아가려고 해. 이제야 지난했던 표류를 쉬어가며 새로이 발견하게 된 근사한 섬에 정박한 것만 같아. 아팠던 나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짜냈던 미세한 힘은 이제 나를 보존하는 일을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해. 긴 터널을 빠져나와 마주하는 세계는 참 달고 황홀해.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길이가 가장 긴 터널은 11km에 달하는 인제양양터널이래. 일 년 반 전쯤에 친구 차로 강릉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 터널을 지나간 적이 있어. 막막했던 긴 어둠이 나의 내면 같기도 했는데, 그 터널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이 당시의 나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어. 나는 터널을 빠져나오고 표류를 쉬어가며 내가 머물게 된 지금의 섬이 마음에 들어. 나를 둘러싼 일상과 내가 발견한 나의 모습, 내가 가지게 된 삶의 태도, 나에게 날마다 인사를 건네주는 섬의 다정한 이웃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평생을 안주하고 머물 수 있는 섬은 없다는 걸 알아. 정이 들면 야속하게도 이사를 가 버리는 동물 이웃들처럼 나도 이 섬을 떠날 날이 있을 거야. 산을 하나 넘었지만 내 앞에 또 다른 산이 나타날 거고, 그럴 때마다 나는 숨이 차 헉헉대며 또 한 번 나를 갱신하는 인고의 시간을 겪을 거야. 전보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렇게 다시 망망대해를 떠돌다 새로운 섬에 도착하게 될 거야. 다른 섬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도 이전의 이웃들을 기억하며 감사해하고 종종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되려고 해. 이번 여름 나를 펜팔로 받아준 언니에게도. 앞으로 불같이 화를 내는 도루묵 씨 말고 상냥한 두더지 이웃이 되도록 노력해볼게.

 

2021 년 7 월 3 일

복숭아가 열리는 섬에서 낮잠을 자고 싶은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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