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시연에게

4주, 시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2021.06.12 | 조회 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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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시연아, 기말시험과 과제와 종강의 달인 6, 비에 젖거나 땀에 젖거나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초여름,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평안하니? 아니면 학업과 더위와 사람들 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니?

지난 편지에서 네가 썼던 마이쮸 이야기를 잇자면, 나는 논비건 때부터 마이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이에 끼는 것도 싫고, 혀가 아릴 정도의 강한 단맛과 인공적인 향도 싫었어. 마이쮸를 먹지 않는 우리들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정현종 시인의 을 떠올렸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갈 수 있을지, 가도 되는지 생각해보기로 했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각자의 섬을 침범하는 일이 필연적인 걸까? 실례가 될까 봐 함부로 연락을 하지 않고, 부담을 줄까 봐 다가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섬에 들어가는 일이 상대에게 폭력이 될까봐 조심스럽고 신중해지곤 해. 거리를 어떻게 좁히고 얼마나 벌려야 할지 가늠하며 때로 상처받고 종종 기뻐하는 일은 평생 쉬워지지 않겠지. 다만 방어적인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 사려깊되 능동적인, 그런 이상적인 사람.

나는 무례함을 남들보다 기민하게 감지하는 편인 것 같아. 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초면에 하대를 한다거나,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에 대한 불확실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무던해지지 않고 매번 불쾌해. 혹시 방금 나한테 무언가 예의없이 군 적은 없는지 돌아보았니? 걱정하지 마. 그런 걱정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보통 잘 무례해지지 않아. 그런데 가끔, 분명 조금 무례한 것 같은데도 불쾌하지는 않고 되려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 능청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을 타고난 사람일 수도 있고, 선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넘어가지는 않을 만큼 능숙해진 사람일 수도 있겠지. 모든 게 조심스럽고 서툰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고 때로 부럽기도 해.

이년 전 너를 만났을 때, 선배이고 언니라지만 나 역시 서툴고 불안정한 스물 하나였으니까, 너에게 별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그 당시 최선이었던 나름의 다정뿐이었지. 네가 나와 만난 날을 평안하고 따뜻하게 기억해주는 것처럼, 네가 내게 줬던 다정함들도 내 기억에 남아있어. 과 행사나 술자리를 귀찮아하며 피하던 내게 새내기였던 네가 조심스럽게 밥약을 걸어준 것, 번호도 교환한 적 없는데 단톡에서 나를 찾았는지 어느 시험기간에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스크림 기프티콘과 함께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던 것, 밥약날 처음 만난 선배가 어색했을 텐데도 아끼는 공간을 소개해주기 위해 연희동에서 상수동까지 나를 데려가줬던 것. 30도 후반까지 기온이 올라 숨 쉬기도 힘들게 더웠던 그 여름, 너와의 만남은 내게 부드럽고 시원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그날 연극을 보았던 연희극장도 시원했고, 연희별곡의 연주를 들었던 제비다방의 공기도 시원했던 것 같아.

네가 보따리처럼 들고 와서 풀어놓은 질문들을 여러 번 천천히 읽어보았어. 열심히 대답을 써보기는 했지만, 내가 너에게 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이 지면은 우리의 고민들을 풀어놓는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매주 배달되는 글을 받아 읽는 고마운 사람들도 그런 질문들을 흔쾌히 함께 생각해주지 않을까?

먹고 사는 걸로 먹고 살고, 글을 써서 먹고 살고 싶다고 네가 인스타그램에 쓴 걸 봤어. 나는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백만원씩 계좌에 입금되면 좋겠다고 종종 이야기하는데, 청자들은 푸하하 웃으며 농담 취급을 하곤 하지만 나는 상당히 진지해. 로또를 사는 사람들이 당첨될 거라고 진심으로 기대를 하곤 하는 것처럼 진심이야. 인생을 불로소득으로 영위하고 싶어.

실상은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국가근로를 다니고, 과외를 하고,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해. 매일같이 출근을 해서 직원들이 하기엔 너무 잡다한 갖가지 심부름을 도맡고, 과외학생과 학부모를 상대하는 일은 고유의 고충이 있지만, 이런 일들은 사실 힘들다고 생각되기보다는 소위 꿀알바로 불리곤 하지. 그런데도 나는 돈벌이를 할 때마다 어떤 비참함을 느껴. 일이 고된 날엔 물론 더하지만 일이 특별히 힘들지 않은 날에도, 돈을 벌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자리를 지킬 때마다 나는 비참해져. 이 자리에 있는 한 나는 시키는 일을 하고 고용인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의식 때문인걸까. 상대는 원하면 나를 쫓아낼 수 있고 그럼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어지리라는 불안과 강박이 나를 억세게 붙잡고 있는걸까. 단순히 고용불안정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생이 돈에 휘둘리고 저당잡힌다는 사실에 대한 비애가 아닌가 싶어.

공부만 하던 중고등학생 때가 제일 좋을 때라는 말이 있지. 하도 많이 들어와서 종종 떠올라. 왜들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기만이라고 생각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순 없을 거라고. 나는 힘이 들 때도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내겐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어. 그 사실이 때로 슬퍼질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라는 타인 사이를 통과해오면서 사라지고 또 얻어낸 모든 것이 나는 밉지 않아. 그러니 믿어지지 않아도 나는 자라고 있고,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 언제나 지금의 나일 것이라는- 경험에 기반한 연약한 기대가 나를 살아있게 해.

편지를 다 쓰면 이제 쌓여있는 기말 보고서들을 써야 해. 너도 아마 비슷한 상황이겠지. 나는 요즘 부쩍 외로움을 타는 친구의 자취방에 와서 과제를 한답시고 앉아 네게 편지를 써. 밖에는 비가 오고 방은 좀 습해. 우리의 편지엔 필자가 한국의 대학생인 이십대 초반 여성들이라는 사실이 지문처럼 묻어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이 글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들지 궁금하다.

타인을 볼 때 그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에 더 눈이 가곤 하지. 내 눈에 비친 너는 학업도, 동아리도, 학원 일도, 창작활동도 잘 해내는 것 같아 보였어. 한편으로는 번아웃이 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아. 네 생활이 궁금해. 어떤 게 기쁘고 어떤 게 슬퍼? 힘들다면 어떤 게 힘들어? 다음주,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듯 가장 고통스러운 종강 직전 시기에 네가 쓰게 될 답장이 궁금하다.

무사히 종강하기를, 무사히 이 여름을 통과하기를.

 

이천이십일년 유월 십일일 금요일 새벽,

종강이 간절한 신희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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