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에게 밥 한번 먹자는 신희 언니에게

3주, 신희 언니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2021.06.05 | 조회 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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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언니, 언니는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져? 우스갯소리로 듣게 된 조언인데 새 학기에 새 친구를 사귀려면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마이쮸를 건네면 된대. “저기, 마이쮸 먹을래?” 이렇게 처음 말을 붙이는 거지. 실제로 나는 열 살 무렵에 이사를 해서 새로운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엄마가 가방 앞주머니에 챙겨준 마이쮸를 셔틀버스에서 옆에 앉은 친구와 나눠 먹으며 말을 걸었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나이가 찰수록 사람과 친해진다는 게, 먼저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보이며 다가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 설령 저 사람이 나의 의도를 오해하지는 않을까, 너무 경박해 보이거나 같잖은 아부로 보이지는 않을까, 사람에게 말을 걸기 전에 이런 걱정부터 앞서.

우리 다음 회의 때에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했지. 어른들은 보통 친해지고 싶을 때 밥 한번 먹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인사치레로라도 그렇더라고. 사람과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든 발전시키기 위한 전초전은 식사를 함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거지. 생각해 보니 소개팅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그런 자리에 잘 나가지 않지만 들어 보니 요즈음 추세가 바뀌어서 양식집에서 마늘 빵에 파스타를 먹는 대신 정갈한 일식집을 주로 가는 것 같더라고. 나무 식판에 덮밥과 장아찌, 두부조림 같은 반찬을 정갈하게 내어주는 그런 곳 말이야. 새내기일 때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저녁 무렵에는 서먹했던 사람들이 함께 밤을 지새우고 첫차를 기다리며 해장국을 먹을 때 나는 일행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된 소속감을 느끼고는 했어. 물론 대부분 일시적인 연결일 뿐이었지만.

나는 내가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해. 그리고 종종 사랑스러운 사람이 참 많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서 자꾸만 옆구리를 콕콕 찌르고 그 사람에게 마이쮸를 하나씩 건네. 그러다 그마저도 모자라서 마이쮸 한 통을, 한 박스를 통째로 건넨 적도 있었을 거야. 그 사람이 마이쮸를 먹기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나를 사랑해줘, 나를 사랑해줘, 배를 누를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두 팔 벌린 곰 인형처럼 나는 내 안에 가득 찬 마음을 표현하고는 했어.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의 흘러넘치는 마음이 불편했겠지. 부담스러웠을 거고 그걸 넘어 폭력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거야. 어쩌면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마다하지 못하고 마이쮸를 기쁘게 받는 척하며 뒤돌아서는 변기에 뱉기도 했겠지. 결국 내 안에 가득 찼던 사랑은 나 또한 체하게 했어. 내가 이렇게까지 마이쮸를 건넸는데, 호의를 보였는데, 내 마음을 고백했는데 어째서 상대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지.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렇게 사뭇 비굴하고 찌질한 불평으로 가득 찬 내 속마음을 발견했거든. 공짜 점심은 없고, 까닭 없는 선물도 없고, 결국 공짜 마이쮸도 없었던 거지. 사람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해서 꼭 그에 상응하는 마음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해 버리는 건 유아적인 일인데 말이야. 나는 참 어렸어. 당장 어제에도 나는 어렸고 오늘도 그래. 나는 어쩜 모든 것들에 이토록 미숙할까.

사실 나는 마이쮸를 먹지 않아. 알레르기 때문에 단 것과 밀가루, 가공식품을 최대한 피하고 있고 턱 디스크가 자꾸 빠져서 껌이나 젤리같이 오래 씹는 간식을 먹지 못하거든. 사춘기부터 항히스타민제를 매일 복용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알레르기가 심해지고 턱관절도 안 좋아졌는데,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핑계로 갖가지 약을 먹고 버티며 병든 몸을 방치했어. 7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온전히 혼자 살게 되어서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생활습관으로 나를 돌보기 시작했네.

언니는 마이쮸를 좋아해? 아니면, 먹을 수 있어? 잠시 인터넷에 찾아보았는데 젤리나 츄잉캔디에 사용되는 젤라틴이 주로 돈피로 만들어져서, 잘은 모르지만 마이쮸는 동물성 재료가 함유된 식품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었어. 그럼 비건인 언니는 마이쮸를 받았을 때 먹지 않겠구나. 음 나도 이유는 다르지만 마이쮸를 좋아하지 않고 먹지 않는데, 서로에게 마이쮸를 건넬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친해져야 할까.

주로 곡선으로 눕는다는 언니는 어떤 형태로 첫인사를 건네고 어떤 자세로 사람에게 다가가는지, 새로운 사람과 어떻게 친해지고 또 그 관계를 이어나가는지 알고 싶어. 자그마치 2년 전 밥약으로 언니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라. 연희동이었지. 연대생들의 농담에 따르면 큰 도로를 기준으로 나뉘는 부자 연희동과 자취방이 즐비한 거지 연희동중 부자 연희동 쪽이었어. 사러가 마트 근처였던가. 카페에서 처음 만났고, 연희예술극장에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와 조해진의 빛의 호위를 각색한 연극을 보았고, 아담한 프랑스 가정식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마지막으로는 상수동으로 넘어가 과 동기 한 명이 합류해 제비다방에서 인디밴드 공연을 보며 칵테일을 마셨어. 지금 생각해보니 처음 만난 선후배치고는 많은 장소와 공연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었네. 통상적인 밥약의 루틴에서 벗어난 만남이었던 거야. 처음 만난 후배에게 선뜻 연극 티켓을 사 주고 근사한 카페에 데려가 주었던 언니의 다정함을 기억해. 그리고 상수동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언니와 대화를 이어나가며 침묵을 어색해하던 새내기 시절 나의 모습도.

실은 그때 무언가에 취해 있는 것 같은 몽롱한 정신으로 여름의 하루를 버티고 있었어. 실제로 무언가에 취해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낮은 고통스러웠고 밤은 그보다 더했어. 언니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미숙한 스무 살의 연애를 하는 중이었고, 지금은 진통제 한 알 먹는 것조차 조심스럽지만 당시 신경계 약물 과용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그 시절의 기억은 보통 논리적인 인과가 아닌 찰나의 이미지와 감각만으로 남아있어. 언니는 그날 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왔던 것 같아. 그리고 해리포터 컨셉의 근사한 가죽 가방을 메고 있었지. 처음 만난 후배에게 한껏 친절을 베풀던 언니의 모습은 해가 도통 지지 않던 7월 초의 따스한 날씨, 그리고 햇살을 받아 번쩍이던 연희동의 푸른 가로수와 함께 내 머릿속에 남아있어.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하루하루가 꿈만 같고 술과 약에 취해 살던 나에게 그 하루는 정말 평안하고 따뜻한 기억이었나 봐. 늦게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게.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10주 동안 서로에게 생명을 주게 될 이 어마무시한 프로젝트를 나에게 선뜻 제안해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2년 전 그날 언니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뭉뚱그려서나마 털어놓았던 걸 기억해. 그때는 내가 학교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고, 내 예민함이나 피해의식 때문에 빈번히 인간관계에 실패하던 나는 친구들, 나의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게 너무 어려웠거든. 지금 나를 둘러싼 상황은 달라졌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 요즈음 나는 나보다 더 강인한 척을 하며 살아가. 나를 지탱해주던 소중한 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느낄 때마다, 혹은 피상적인 관계에 지칠 때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안일함으로 넘기고 있어.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내 관심과 애정을 쏟기도 하면서 그렇게.

꼭 무슨 사고라도 쳐 버릴 것만 같이 정신을 쏙 빼놓는 여름의 초입이야. 이 시기, 열아홉에는 응급실에 실려 갔고, 스물에는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가 술에 취한 채로 넘어져서 발목에 반깁스를 했어. 스물하나에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행히 신체적인 상해를 입지는 않았어. 올해에는 더 조심해야겠지. 자중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마이쮸를 한 움큼 건네고 싶더라도 내 마음을 억누르며 낯선 이에게 더 사려 깊게 다가가는 방식을 배우고, 나를 다스리며 차분해지려고 해.

언니는 이 여름을 어떻게 맞이할 생각이야? 섬세한 마음의 결을 가진 언니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어. 천진난만한 새내기처럼,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을 모았다가 보따리처럼 이렇게 풀어 보네.

밤이 짧아지고 있어. 언니가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잠을 자기를 바라. 다음에 회의를 위해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언니 말대로 맛있는 걸 먹자.

 

2021 5 31

마이쮸를 못 먹는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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