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신희 언니에게

5주, 신희 언니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

2021.06.19 | 조회 484 |
0
|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근래 나의 생활, 그리고 나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 묻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어. 이건 밥 한번 먹자라는 말처럼, “잘 지내?”라는 물음처럼 으레 형식적으로 덧붙이는 말일까 싶어서. 하지만 저번에 맛있는 걸 먹자는 언니의 말이 진심이었듯 이번에 나에게 물어준 것들 또한 진정 언니가 궁금해했을 거라 믿어. 사실 요즈음 내 일상은 뻔해. 나의 기쁨도 슬픔도 단순하고. 언니도 알고 있듯이, 언니와 마찬가지로 나는 학부 졸업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20대의 대학생이고, 이번 주와 다음 주는 기말 시험 기간이니까. 언니도 다 알면서 물어본 거지? 기말 리포트가 몰려 있는 주, 폭풍 전야에 쓰게 될 내 편지를 궁금해하는 언니의 말이 조금은 짓궂게 느껴지기도 해.

그래서 이번에는 호기롭게, 평소 같았으면 편지 쓰는 게 내키지 않았을 시기이지만, 하는 수 없이 글을 적게 된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며 인사를 건네고 싶어. 언니는 어떻게 지내? 바쁘게 지내고 있지? 나도 마찬가지로 다 알면서도 물어보네.

나는 바쁘게 지내고 있어.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일에 내가 얼마나 버티고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고, 올해 그 가부가 결정된다는 생각으로 공부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어. 주변과의 왕래도 잠시 끊었고 휴대폰으로는 급한 문자만을 확인해. 사실 근 몇 주간 시집 한 권에 빠져 살고 있어. 십 대 시절 친구들 앞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가 내심 부끄러웠던 것처럼 시집 제목을 말하는 게 망설여지니까 여기서는 밝히지 않을게. 이 시집 한 권이 내 발목을 잡은 것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이 시집에 답하는 글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편히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것 같고 죽는다고 해도 눈을 뜨고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내가 너무 과장하는 건가. 그렇지만 정말이지 그래. 길을 걸어가면서도, 버스에서도 시집을 읽고, 시를 직접 녹음해서 틀어둔 채로 눈을 감고 누워 장면을 상상하기도 해. 그러다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환희에 차면서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내가 있는 이곳은 마치 외딴 섬 같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섬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중의적이지. 사람들 사이에 놓임으로써 그들을 이어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화합과 공감의 공간일 수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 타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된 외딴 공간일 수도 있어. 나는 그 섬을 후자로 이해하기 좋아해. 여름이면 외딴 섬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상상을 종종 해. 언니에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이란 어떤 공간인지 궁금하다.

작년 이맘때에도 열흘 동안 혼자서 외딴 섬 프로젝트를 한다며 SNS와 카카오톡 같은 연락수단을 모두 단절한 채로 지냈어. 전달해야 할 동아리 공지가 있을까 봐 컴퓨터로 하루에 단 두 번 카카오톡에 접속한 걸 제외하고는 외부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자취방에서 책을 읽고 기말 리포트를 쓰고 새벽이 되면 산책하러 나갔어. 그건 일종의 실험이기도 했는데, 주변에서는 유별나게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를 극단으로 몰아서라도 나는 내가 상상한 외딴 섬에 가고 싶었던 거야. 후일 나는 친구들에게 그 경험을 유배라 표현하고는 했어. 정말 유배나 다름없는 열흘이었거든. 내가 특별히 외향적이거나 혹은 내향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내 성향을 떠나서 유배상태로 시끄러운 신촌 로터리 근방 오피스텔에서 표류한다는 건 참 낯선 경험이었어.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고 책과 논문을 읽고 글을 쓰던 당시, 내가 직접 찾지 않는 이상 외부의 자극이 없었기에 나는 내가 보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 충실할 수 있었어. 그중에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은 욕망도 있었어. 숱하게 내 일상을 공유하고 시답잖은 잡담을 주고받던 모든 부류의 SNS를 꽁꽁 봉쇄하고 카카오톡과 문자라는 최소한의 연락수단마저 제한하고 나니까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거든. 홀로 된 해방감도 잠시뿐이었고 나는 종종 벅차오르는 감정에 주변의 인연들을 한 명씩 내 앞에 세워두는 상상을 하며 말을 걸고는 했어. 섬에서의 표류가 끝나고 나면 이 말을 꼭 해 줘야겠다, 누군가를 두고는 이런 다짐도 했지. 그때 느꼈어. 내가 평소에 누구 생각을 많이 하는지, 내가 정말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금욕적이고 절제되었던 열흘간의 생활 속에서 나는 내 욕망에 가장 솔직하고 충실할 수 있었던 거지.

유배 생활이 한창이던 중에 정말 말 그대로 물리적인 외딴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그래서 지도 앱을 몇 시간 들여다본 끝에 강화도의 수많은 군도 중에 하루에 배편이 단 둘뿐이고 섬에 펜션이 단 하나뿐인 섬을 찾았어. 혼자 덜컥 떠날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전이 걱정되어 마음이 맞는 동행을 구해 떠났는데, 삼십 분을 걸어야 겨우 사람 한 명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인적이 드물고 면적이 작던 그 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선착장으로 이동하는 것부터 배가 섬에 도착하기 전 하나뿐인 마트가 문을 닫아버리는 상황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까지, 관광객인 신분이지만 일거수일투족을 섬마을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야만 했어. 게다가 펜션 주인아주머니가 마침 육지에 가 계시던 상황이라 주인 없이 펜션에 머무는 기이하고도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었어. 치기 어린 마음에 차도 없이 오로지 대중교통만으로 강화도에 가서 또 마을버스를 타고 배를 타서 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는 30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에서 걸어 다녔거든. 그 경험은 낯선 곳에서의 모험 그 자체였어. 그리고 나는 이번 여름에도 외딴 섬에 가는 꿈을 꿔. 작년과 같은 섬에 갈지, 아니면 또 다른 외딴 섬을 찾아낼지, 혹은 외딴 섬을 은유로 읽어내는 데 그칠지 잘 모르겠지만.

언니만의 외딴 섬이 있다면 어디야? 그곳에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외딴 섬으로의 여정에 동행한 적이 있어? 혹은, 그러고 싶어? 언니의 외딴 섬에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어?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번 초여름에도 SNS를 쉬고 필수적인 업무를 제외한 모든 연락을 차단해놓은 채로 지내고 있어. 그러니 지금은 모두의 섬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야. 장난스러운 원망으로 시작했지만, 언니가 넓은 아량으로 웃으며 받아쳐 줄 거라 믿어. 편지를 완성하고 나서 느꼈는데, 나 실은 바쁘고 정신없는 틈에도 편지가 쓰고 싶었던 것 같아. 아무리 기말 리포트로 바쁜 시기라 할지라도 내 기쁨과 슬픔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았던 거야. 불 꺼진 방에 외로이 앉아 편지를 쓰다 보니, 다 알면서도 물어보고 답을 기다려주는 사람의 마음이 퍽 따스하고 다정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러다 문득, 이 편지는 어쩌면 평론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네. 사람들에게 언니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고 언니의 이야기를 매개해주기 위한 글이지만 모든 건 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고 속속들이 내 이야기가 끼어들기도 해. 평론이 그 대상이 되는 글에게 갖추어야 할 예우는 어쩌면 편지의 수신인에게 갖추어야 할 예우이기도 할 거야. 멋대로 재단해서도, 온통 나의 이야기만으로 글을 채워서도 안 되겠지.

편지가 쓰기 싫다고 서두에서부터 떼를 쓰는 내 편지는 그래서 결국 어땠어? 언니의 냉정한 평가를 기다릴게. 언니 생각에 남들에게 보이는 이 편지를 진정한 의미의 편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관계를, 우리 간의 거리를 조정해 보기 위한 편지를 써 보기로 했지. 우리가 '독자'라 명명한,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를 지켜보는 수많은 타인으로 존재할 이 시선을 따로 떼어놓고 관계를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까? 모든 관계는 결국 타인에게도 보이는 거니까 어쩌면 이렇게 공개되는 우리의 편지의 형식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걸지도 몰라.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그게 누가 되었든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면 입을 떼는 데 도움이 되지. 다음 주에 언니도 편지가 쓰고 싶어지기를 바라. 언니의 편지가 나에게 그러했듯, 나의 편지도 언니의 목소리로 언니의 이야기를 하는 데 모종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 매주 쉼 없는 고민과 설렘을 안겨줄 이 열 통의 편지가 2021년 여름에 밉지 않은 흔적을 남기기를.

2021 6 16 일 새벽 한 시경,

외딴 섬에 두더지처럼 숨어 지내는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