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함께 철들어가는 처지인 시연에게

2주, 시연에게 보내는 첫 편지

2021.05.29 | 조회 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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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시연아, 손편지가 아닌 워드 파일인데도 다정함이 묻어나는 너의 세심한 편지를 받아 읽으며 나는 퍼뜩 겁을 먹고 말았어. 내가 답장을 써낼 수 있을까? 어쩌자고 이런 걸 덜컥 시작했지? 여기서 못 하겠다고 하면 시연이에게는 무슨 민폐고 주변에는 얼마나 민망하려나? 노트북을 밀어두고 한동안 방바닥에 선처럼 가만히 누워있었어. 나는 주로 곡선으로 누워.

, 용기를 내서 다시 노트북 속 백지를 마주했어. 이렇게 겁을 잘 먹어서 나는 항상 몸도 마음도 조금 긴장해있는 상태야.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늘 불안하고 해내지 못했을 때를 상상하며 무서워해. 내 삶의 많은 날들이 그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얼렁뚱땅 진행돼왔어. 나는 내가... 아직 살아서 이렇게 글도 쓰고 학사경고도 어찌어찌 면하고 월세도 어찌어찌 내고 있는 게 종종 신기해.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었는지, 요즘에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아야지, 하는 태도가 내게는 의지였고 위로였으니까.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은 삶에게 자꾸만 존재 이유를 묻게 하니까. 그런 질문공세가 펼쳐지면 순진하고 나약한 삶은 찔끔 울면서 숨을 곳을 찾게 되니까.

내 생활에 대해 물어줘서 고마워. 무엇에 행복해지는지 궁금해 해줘서 고마워. 혼자서 자꾸 질문을 주워섬기면서 고민하다 보면 사람이 아주 못 쓰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나는 요즘 생각이라는 행위를 지양하며 살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질문해줬으니,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하는 고민은 이제 내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어. 정식으로 묻고 답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새로운 일이구나.

요즘 나는 무언갈 먹는 일이 지겨워. 하루에 두세 번이나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정말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 매번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게 피곤해. 잠은 잘 자. 얼마 전까지는 불면증에 고생하다가 요즘에는 또 종종 과수면을 해. 눈을 뜨면 해야만 할 갖은 일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계속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자는 것 같아. 언제 행복하냐고 물으면, 글쎄, 요즘의 나는 행복에 그리 큰 가치를 두지 않으려고 해. 얼마 전에 행복은 철학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냥 동물적인 쾌락일 뿐이라고 책에서 읽었거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함께 식사를 해야 한대. 다음 대면 회의 때는 우리도 먼저 맛있는 밥을 같이 먹은 뒤에 프로젝트 이야기를 해보자.

시연아, 몸과 마음은 분리하기 어려운 애들이라 보통 같이 아프곤 하더라. 몸이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면 진통제를 먹어 봐. 인간은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진통제를 먹으면 우울함도 완화된대. 독립한 너의 방은 때때로 너를 잡아먹는구나. 내겐 본가의 내 방이 그랬어. 나를 병들게 하던 멍울들은 거기 있었어. 혼자 울던 고등학생 때의 내가 여전히 거기서 울고 있는 것 같았어. 이사를 해도, 가족과 화해를 해도 달라지지 않더라. 나는 그래서 나왔어. 그렇다고 해서 독립을 하니까 마법처럼 내 모든 슬픔과 불안이 사라진 건 물론 아니야. 자기만의 방에서도 여전히 나는 너처럼 종종 늪 같은 우울에 잡아먹히곤 해. 그러면 어쩌겠어. 혼자 꼼짝없이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지. 다만 그것이 공간의 문제가 아니란 걸 나는 이제 알 수 있어. 그건 내게 꽤 의미가 있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납득하고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근데 세상일이 나를 숨만 쉬어도 예쁘다고 내버려 둘 리 없잖아. 나는 어디까지 노력해야 하고 어디까질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 '-'에 지친 사람들이 '다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는 소위 '힐링' 책들을 계속해서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만, 정작 그들은 여전히 잔뜩 힘이 들어가선 가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가운데서 나는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걸까?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려워.

경의선 숲길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받으며 글을 쓰는 모습은 내 머릿속에 있던 네 이미지와도 부합해. 강아지와 고양이가 창밖 풍경을 보는 건 인간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같다던데, 지나가는 사람들과 산책 나온 반려견들을 보는 너도 그런 느낌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봤어. 너 또한 나만큼이나 고민하고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각자의 무게는 각자의 몫이니 서로가 어찌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와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이 너에게 재미있는 시간이면 좋겠어. 우리에게 재미를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10주짜리 연재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거라 생각해. 그리고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가, 내가 나인 것을 넘어 네가 너라서 쓸 수 있는 편지가 되기를, 서투르지만 진심으로 바라.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과 견과류 세 봉지 고마워. 집들이 선물이라고 생각할게. 다음에는 와서 방명록 쓰고 가. 올리브와 레몬이 그려진 오일 병은 예쁘게 생겨서 다 쓰면 화병으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나는 아직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어. 너라면 여기저기에 정갈하게 잘 사용할 것 같은데 말이야. 이걸 쓰려면 요리를 하고 끼니를 잘 챙겨 먹어야겠다. 나를 부지런해지게 만드는 선물 고마워. 잘 써볼게.

시간을 주는 건 생명을 주는 것과 같다고 신형철 평론가님이 썼어. 우리는 10주 동안 꽤 많은 생명을 서로에게 주게 되겠지. 생각지도 못하게 너를 많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너에게 묻고 싶어졌어. 너는 괜찮아? 지낼 만 해? 잠은 잘 자고, 밥은 잘 먹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는 거나 밤에 잠에 드는 게 지나치게 힘이 들지는 않니? 음식을 먹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아?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연재를 시작하며 너는 거리두기에 대해 이야기했지. 네 말대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할까.

모쪼록 네가 편안했으면 좋겠어. 네 이야기를 기다릴게.

 

 

2021 5 24일 월요일,

널브러진 이불과 베개가 부끄러운 신희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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