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심만큼 참을성도 많은 신희 언니에게

1주, 신희 언니에게 보내는 첫 편지

2021.05.22 | 조회 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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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5월의 경의선숲길
5월의 경의선숲길

 

“Where are we?”

2 년째 독립 영화잡지의 에디터로 글을 쓰고 있는 언니답게, 언니가 우리의 편지를 통해 던지고 싶은 첫 질문은 영화 라라랜드의 대사였지.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우선 나는 자정을 앞둔 늦은 밤, 간만에 선선한 여름 밤의 날씨를 느끼러 경의선 책거리에 나와 있어. 언니와의 두 번째 사전 미팅을 마치고 바로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그 길로 산책을 나왔어. 이곳은 작년에 자주 걷던 길이야. 운이 좋게 비가 오지 않으면 새벽에 경의선 책거리부터 경의선 숲길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는 했는데, 매일 같이 산책을 나온 반려견과 다정한 연인들을 마주치게 돼. 그 둘은 나에게 있어서 꽤나 흥미로운 구경거리여서 자세히 관찰하고는 했어. 주인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달리는 작고 어린 개, 작고 나이가 많은 개, 크고 나이가 많은 개, 그리고 크고 어린 개가 있어. 그리고 처음 만나기 시작한 듯 손을 잡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연인부터 늦은 밤 보리차를 물병에 싸 들고 걷기 운동을 나온 노부부까지, 사랑의 모습도 참 다양해.

벤치 위에 연인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캔을 바라보며 관계의 끝을 생각하기도 해. 쓰레기는 버리고 가야지, 싶어 화가 나다가도 그 끝에는 어떤 것들이 남는지 자세히 들여다 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자필반 회자정리라는 불교 사자성어를 좋아했어. 자그마치 4 년 동안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로 설정해 둘 정도로 그 말은 나에게 명쾌한 지침이 되어 주었어. 연을 맺게 된 사람들은 어떤 연유에서든 언젠가 헤어지고, 또 갈라서게 된 사람들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 말을 되새기면서 나는 모든 관계에서 초연해지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그 덕에 나는 산뜻하고 설레는 새 만남에서도 너무 경박해지지 않을 수 있었고, 몸 한쪽이 찢어지는 것만 같던 이별 앞에서도 담담하게 내 뒷모습을 보일 수 있었어. ‘언젠가라는 말에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나는 끊어진 인연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를 상상하고는 해. 어떤 걸음걸이로 다가가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까, ...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연습해 봐.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욕심껏 많은 미래를 꿈꾸지만 그 중 오직 하나만이 현재가 되잖아. 지금, 여기에 닿지 못하고 날개가 젖어버린 수많은 미래. 그 미래를 모아둔 나의 또 다른 우주를, 평행세계를 상상하는 거야. 이를테면 너와 내가 헤어지지 않은 혹은 다시 만난 세계와 같은. 하지만 그곳의 나는 또 다른 죄가 있고 또 다른 후회를 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그래서 빈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견디기 힘들 만큼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 나는 형편없는 선택지 중에서 고민하며 내 미래를 견주어 봐. 스스로만을 사랑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혹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온정을 키워나가거나. 인연이 끊어진 자리는 이토록 두렵기만 해.

언니를 대략 2년 만에 다시 만나러 가기 전, 언니와 다시 마주치는 순간을 상상해 보기도 했어. 나는 부쩍 철이 든 후배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연재를 앞두고 가졌던 두 번의 만남 모두 내가 약속을 한 번씩 다른 날짜로 바꾸기도 했고, 또 바뀐 약속에마저 늦어 버렸어. 언니는 스스로가 욕심이 많다고 했지만 언니에게 더 많은 건 아마 참을성이 아닐까. 컨디션이 들쭉날쭉하고 잔걱정이 많아서 약속을 미루고는 하는 나를 기다리는 동안, 유예된 약속 시간 동안 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어디에 와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고 또 기다릴 수 없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독립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내가 홀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사는 모습은 한국 사회가 뭉뚱그린 청년의 이미지와 꽤나 잘 겹쳐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나면 친구와 한강을 걷고 또 그 주변에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상상을 해. 허구한 날 보는 게 한강 야경이라지만 한강은 한 번도 우리 것이었던 적이 없었고 나는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어하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실패를 무릅쓰고 건실하게 살아가. 공모전을 기웃거리고, 학교 공부에 열중하고, 월세와 생활비를 벌 궁리를 해. 청년이라는 기획에 빠진 우리 또래에게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지.

언니는 어디에 와 있어? 독립한 생활은 어때? 무얼 먹고 지내고, 무엇에 행복해지는지가 궁금해. 또 혼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아플 때에는 어떻게 하는지도. 나는 지독한 역마살이 낀 건지 열네 살부터 스무 살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작년에 처음으로 온전한 독립을 하고 나서부터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오고는 했어. 내가 아니면 나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고 내 방에서 혼자 소리소문 없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일 년간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적들은 죄다 나의 단칸방 안에 있었어. 끊임없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생각에 빠지면 나는 다름 아닌 나 스스로와 싸워야 했던 거야. 그래서 많이 궁금해. 다른 1인 가구의 가장들은 어떻게 지내고는 하는지, 어떻게 이 어려움을 버텨내고는 하는지.

카페 마감이 일러서 회의를 마저 끝마치기 위해 언니의 집에 들렀을 때 눈에 띄었던 건 유리컵에 꽂아둔 분홍색 미니 장미 한 단과 언니가 내어 주던 동백꽃 차였어. 널브러진 이불과 베개, 아몬드 브리즈 팩,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머그컵, ... 이 모든 것들이 언니의 삶을, 언니의 일상을 전시하고 있었지. 종종 사람들의 집에 놀러갈 때면 영국의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라는 설치미술 작품이 떠오르고는 해. 나의 방만큼, 그 안의 침대만큼 내밀한 공간이 또 있을까. 결국 모두들 이해받고 싶다는 외로움과 동시에 해부 당하고 싶지는 않은 미묘한 욕망이 만난 곳에서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게 되겠지. 나도 간혹 체취가 묻은 이불과 옷가지와 책이 널브러진 내 침대를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가 이내 모든 걸 덮고 숨겨버리고는 해. 날씨와 같이 나를 휙휙 드나드는 감정을 일기예보처럼 이야기하고 싶다가도 이 모든 게 경박스럽고 주책맞다고 생각해.

나는 어디에서 무얼 기다리고 있을까.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근면히 안부를 묻는 내가 되고 싶어. 들어오는 사람마다 환영 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방을 갖고 싶어. 그 사적인 공간에 묻은 나의 습관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증을 많이 자아내는 침대를 갖고 싶어. 내가 온화하고 넓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또 기다리며 좁은 방의 복층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

언니는 어디쯤 와 있어? 나는 산책에서 돌아와서 이제 집이야. 언니도 집에 있지? 읽다 만 시집 몇 권이 지붕 모양으로 뒤집혀 있는 나의 침대 위에서 이렇게 글로 안부를 대신 전할게.

 

2021.05.13. 목요일

10 주 동안 비급여 연재 노동자로 살게 된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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