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삼성도 처음엔 국수 팔았다. - 호암 이병철(Samsung)

도전과 확장: 위기 속에서 기회를 낚아채다

2025.12.12 | 조회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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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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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확장: 위기 속에서 기회를 낚아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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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그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6.25 전쟁은 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서울의 공장은 불탔고, 창고는 약탈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머릿속에 있는 '경험'과 가슴속에 있는 '의지'는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절망하며 하늘을 원망할 때, 나는 부산의 부두에서 고철을 주웠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 그것은 책상 위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맨주먹으로 다시 일어선 나의 치열했던 '생존의 기록'을 자네들에게 바칩니다.

📍 장소 1. 대구 삼성상회: 별 셋이 뜨다

별표 국수
별표 국수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서문시장 근처)

1938년 3월 1일, 그는 대구의 서문시장 근처에 목조 건물을 얻어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삼성상회(三星商會)'.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시작한 이 가게는 대구의 사과와 동해의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물건을 떼다 파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국수를 만드는 기계를 들여와 '별표 국수'를 제조했습니다. 이는 그가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관심을 돌리는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품질 관리에 집착했고, 고객과의 약속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어느 날 사과 상자에 썩은 사과가 섞여 들어갔다는 항의를 받자, 그는 즉시 전량 리콜해주고 사과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삼성상회는 '신용'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업의 본질이 이윤 추구가 아닌 '신용 축적'에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 장소 2. 서울 종로 2가 삼성물산 공사: 세계를 향한 창

삼성물산 공사
삼성물산 공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해방 후, 이병철은 대구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1948년, 그는 '삼성물산 공사'를 설립했습니다. 좁은 우물 안 개구리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지와 무역을 시작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익혔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오징어와 한천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면사, 설탕, 재봉틀 등을 수입해 국내에 공급했습니다. 물물교환 수준이었던 무역업을 체계적인 국제 비즈니스로 격상시켰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해외 시장의 가격 변동, 환율, 정치 상황 등 모든 정보가 곧 돈이었습니다. 그는 신문을 탐독하고 사람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이 훗날 '정보의 삼성'이라 불리게 된 기원이 바로 이곳입니다.

📍 장소 3. 부산 국제시장 인근의 허름한 사무실: 전쟁과 재기

대구 양조장 앞
대구 양조장 앞

주소: 부산광역시 중구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서울에 있던 모든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채 그는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숨겨둔 '보험'이 있었습니다. 전쟁 직전, 대구에서 양조장 사업을 하며 벌어들인 수익금을 꼬박꼬박 챙겨두었던 것입니다.

부산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그는 삼성물산을 재건했습니다. 전쟁 통에 물자는 더욱 귀해졌고, 그는 고철을 수집해 일본에 팔고, 설탕과 비료를 들여왔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남들이 절망하며 하늘을 원망할 때, 그는 땅에 떨어진 고철을 주웠습니다. 위기는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라는 뻔한 말을, 그는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시기 축적한 자본은 훗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는 종잣돈이 되었습니다.

📍 장소 4. 부산 제일제당 공장: 수입 대체라는 사명

부산 제일제당
부산 제일제당

주소: 부산광역시 전포동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수입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는 제조업 진출을 결심했습니다.

주변의 반대는 극심했습니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장을 짓는 것은 무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설탕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1953년, 그는 국내 최초의 설탕 공장인 '제일제당'을 설립했습니다.

공장 건설 현장에서 그는 밤잠을 설치며 기계를 점검하고, 일본 기술자들에게 기술을 배웠습니다. 첫 생산된 하얀 설탕가루를 손에 쥐었을 때, 그는 단순한 제품이 아닌 '국가의 자립'을 보았습니다. 제일제당의 성공은 한국 제조업의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 장소 5. 대구 제일모직 공장: 기술 자립의 꿈

대구 제일 모직
대구 제일 모직

주소: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의식주 중 '식'을 해결한 그는 이제 '의'에 도전했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비싼 수입 양복지를 입거나, 질 낮은 옷감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는 "영국제보다 더 좋은 양복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했습니다.

여공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고, 공장 조경에 신경을 쓰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복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사람이 전부다"라는 그의 '인재 제일' 경영 철학이 구체화된 현장이었습니다. 불량품이 나오면 전량 불태워버리는 품질에 대한 집착은 제일모직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기술 자립만이 살길임을 확신했습니다.

Epilogue: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 간절함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설탕 공장을 짓고, 기술 불모지에서 최고급 양복지를 만들어낸 이병철의 여정은 '간절함'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국민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업보국'의 이념이 그를 움직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문제 앞에서 주저하고 있습니까? 상황이 안 좋아서, 가진 게 없어서 포기하고 싶습니까? 이병철은 전쟁 통에도 고철을 주워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환경을 탓하기 전에, 당신의 목표가 그만큼 간절한지 자문해보십시오. 다음은 이병철이 어떻게 반도체라는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여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이끌었는지,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도전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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