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세비야를 보지 못한 자,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2/2)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 비로소 건축가를 만났다.

2025.12.13 | 조회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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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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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있다는 공포는 국적도, 배경도 지워버렸다.

나이지리아, 이집트, 스위스, 스웨덴, 독일, 프랑스...

이유없이 데면데면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이야기를 텄고, 어느 순간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단절된 세상 속, 인간은 결국 홀로 설 수 없는 지독한 사회적 동물임을 새삼 느낀다.

 

벌거벗은 문명과의 조우

그러던 중, 누군가 툭하고 말을 던졌다.

"여기까지 와서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ña)을 못 보고 가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다.

 

"문 닫혔을 텐데?"

"담 넘자."

우리는 공범자가 되기로 했다.

관광객이 없는 틈을 타 가지치기가 한창이었는데, 결과물이 독특했다. 게임속에서 나온 것 같던 나무.
관광객이 없는 틈을 타 가지치기가 한창이었는데, 결과물이 독특했다. 게임속에서 나온 것 같던 나무.

 

무서워서 빠진 두 명을 제외하고,
(맞다. 이 사람들이 옳다. 그 땐 코로나 상황에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겁 없는 넷은 새벽의 거리로 나섰다.

군인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금지된 것을 넘본다는 짜릿함.

서로의 어깨를 밟고 손을 당겨, *우리는 굳게 닫힌 철창을 넘었다.

 

 

그리고 눈 앞에 마주한 - 시간이 멈춘듯한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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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멎을 것 같았다.

 

언제나 수천 명의 인파로 북적이던 그 거대한 반원형의 광장이,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인류가 증발해 버린 영화 세트장처럼.

사람 냄새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채운 건, 이 시기를 대변하는 듯한 냉정한 고요함, 그리고 이 일은 우리와는 상관 없다는 듯 아우성치는 오렌지와 라임 꽃향기 뿐이었다.

 

다행히 조명은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인파라는 풍성한 옷을 벗은 채 나체로 누워 자고있는 여신 같았다.

 

우리는 그 텅 빈 광장의 주인이 되어 걷고 또 걸었다.

이 광장을 막 짓고 난 건축가와 나누는 내밀한 대화.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관광객의 소음에 묻혀있던 타일의 무늬, 기둥의 곡선, 벽돌의 질감.

"나는 이렇게 설계되었었노라"고 말하는 듯한 발가벗은 문명과의 홀연한 조우. 

 

나는 소음이 걷힌 자리에서 건축가가 의도한 순수한 조형미를, 그 기적같은 아름다움을 독대했다.

 

비현실적인 풍경속에 오직 우리들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울렸다.
아찔한 침묵 그리고 이로인해 더 선명해진 광장 그 본연의 완벽함 속에서 나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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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죽어있다.'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공허한 아름다움을 본다.

이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곳은 광장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설계한 저 거대한 빈공간은 비어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온기로 채우기 위함이었으리라'

 

광장의 본질은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의 소음에 있음을 느낀다.

 

 

탈출 그리고 영국

꿈같은 일탈도 잠시, 현실은 빠르게 목을 조여왔다.

비행기가 끊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비야는 아름다웠지만, 기약 없이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집과 다를 바 없는 고립은 여행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 뉴스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집단 면역 전략을 시도한다는 기사였다.

"내가 먼저 걸려보겠다"는 그 무모해 보이는 발언이, 나에게는 유일한 탈출구로 보였다.

 

"영국은 하늘길이 가장 늦게 막힐 거야. 거기로 가야 해."

 

나의 판단에 몇몇 한국인 친구들은 동의했고, 우리는 도망치듯 짐을 쌌다.

그렇게 나의 첫 스페인 여행은 어영부영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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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진짜 기적은 사람에게 있다

계획된 일정은 모두 취소됐고, 관광지는 문을 닫았다.

나는 "세비야"를 보러 갔지만, 세비야를 보지 못했다.

성적표로 따지면 0점짜리, 완벽하게 망한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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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를 보지 못한 자,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문 닫은 카페의 뒷문에서 건네받은 라떼와 사장님의 미소를 생각한다.

공포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았던 옥상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잃고나니 그때서야 깨닫는 것 -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행의 맛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엇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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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텅 빈 광장과 거리에서,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세비야의 맨얼굴이라는 기적을 보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던 '세비야의 기적'은 이것이 아니었음을,

그곳에 모인 사람, 그 뜨거움 자체였음을.

 

 

나는 다시 세비야에 갈 것이다.

완성된 광장, 건축가가 설계하고 사람이 완성하는, 그 기적을 보기 위해.

 

(세비야를 보지 못한 자, 기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편 마침)

* 나도 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일탈로 보아주십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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