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뭔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검색을 하다가 옆에 있는 H에게 물었다. “인생? 수능이지!” 오~ 예비 고3다운 답변이 나오려는가 싶어 기대가 됐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리 저항해봤자 나만 손해야. 그냥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게 제일 편한 것. 그게 인생이야.” 아... 수능이 아니라 순응. 공부 안 할 거라고, 대학을 왜 가야 하냐고 중학교 때까지 저항하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학원 보내달라’고 한 전적을 돌아보니 그 의견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지금 이게 순응한 거라고? 시험 끝났다고 몇 시간째 휴대전화와 연애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녀석의 백일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걸어두었던 사진이,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는 데 사용될 거라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어찌 되었든 효과는 직빵. 아련해진 마음으로 다시 녀석을 돌아보자, 무언가와 겹쳐 보인다. 한쪽 머리가 크게 부어오른 신생아의 얼굴. 젖을 양껏 먹은 뒤 포만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어졌던 입. 그 입을 헤 벌리고 곯아떨어졌던 작디작은 얼굴... 녀석을 만나던 날의 일이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밤중이라고 표현될 만큼 이른 새벽에 규칙적인 진통을 감지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신만만했다. 몇 번 세게 힘만 주면 아기를 금방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산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적잖이 들었지만(그래서 사실 조금 쫄기도 했지만), 그 모든 험난은 나와 상관없을 거라 믿었다. 나는 이제 막 20대 중반을 지났고, 초반에 유산기가 있었던 것 말고는 산전 검사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감이 충만한 채 출산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남편이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부산까지 아무리 오래 걸려도 4시간 반. 나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아기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진통은 14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아기가 내 몸을 찢기라도 하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극에서나 봄직한 거열형(사람의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이 이와 같을까. 호흡을 이렇게 하라느니, 힘을 이렇게 주라느니 옆에서 간호사와 의사가 번갈아 가며 조언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14시간 내내 쉬지 않고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진하게 온 뒤, 잠깐의 무통이 오는 식의 과정이 반복됐다. 진한 고통 뒤의 무통의 순간은 거친 오르막길을 겨우 오른 뒤, 숨 고르며 쉬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쉼도 잠시, 오르막은 다시 시작되었고 넘어야 할 고개는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반복되는 고통이 어느 시점에서는 공포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진통은 오후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아기 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내진하던 의사는 분명 스마트한 어조로 말했었다. 이 정도 속도면 저녁 7시쯤에 아기가 나오겠다고. 정상이 곧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면 끝나는 거야. 힘내자, 파이팅! 남편도 웃으며 말했고, 나도 힘을 내며 웃어 보였다. 먹은 것이 없고 관장까지 한 마당에 대체 어디서 힘을 끌어와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끝이 보인다고 하니 웃을 수밖에.
그러나 나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휠체어에 몸을 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곧 보게 될 거라는 아기는 좀처럼 나오지 못했고, 무통 주사의 효력은 다한 데다가 태아의 심박수가 200을 치닫기 시작했다. 열을 재던 간호사가 당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제왕절개 수술이 잡혔다. 나는 진심 눈물이 났다. 지금껏 고생한 건 다 뭐란 말인가. 결국 수술이라면 진통의 과정은 왜 겪어야 했단 말인가. 수술을 거부하고 싶었다. 아기를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조금 더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눈물을 질질 짜며 고개를 흔드는 나를 남편은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하자. 아기가 위험하다잖아. 너도 위험하다잖아. 나도 나지만 아기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 버틴다고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차가운 수술대 위로 올려야만 했다.
수술이 끝나고 정신 차려 보니 아기의 머리 한쪽이 크게 부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기의 머리 안쪽 혈관이 터졌다고 했다. 피가 나서 고여 있느라 머리가 부어있다는 설명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흡수되고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순풍, 하고 밀어주지 못한 마음에 너무 미안했다. 게다가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안에서 태변을 누고 그 태변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기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위세척을 해야 했단다. 수술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기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 것 없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만 한 남편이 얄미웠는데, 그의 이른 결정이 아기를 살린 거였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아기도 힘들었다.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태변을 누고, 그 태변이 입 안으로 들어가고, 산도에 눌려 머리가 부었다. 험난한 출산의 여정은 나의 외로운 여정이 아니었고, 아기와 함께 헤쳐 나온 거였다. 포기하지 않고 함께 생명을 지켜냈다는 생각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온 가슴을 덮었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이와 같을까. 인생 어느 때쯤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언제 고생했냐는 듯 입을 헤 벌리고 잠든 아기를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이란 이런 것일까’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능처럼 아기를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 욕심대로 살고 싶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 현실에 순응할 줄 알아야 행복을 거머쥘 수 있는 것처럼, 아기를 지키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술이라는 해답에 순응해야 했다. 검색해서 대충 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의 답은 내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H가 한 답변에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인생은 수능인 동시에 순응.
나는 아기와 겹쳐 보였던 녀석의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한번 흩트렸다. 짜증 어린 눈길로 나를 노려보는 녀석에게 눈으로 얘기했다. 고마워, 잘 자라줘서.
[저자소개]
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쓰고 뱉다’(글쓰기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7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한 뒤 20년차 주부로 살고 있으며, 초, 중, 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지금은 ‘안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 학교에서 4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머릿결’이라는 필명으로 7권의 웹소설 전자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즐깁니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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