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나는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가가 내려오라고 힘 있게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내려가다 보면, 의문이 든다. 내가 딛고 일어서야 할 바닥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바닥에 닿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 바닥을 디뎌야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거라고. 한 번쯤은 그 바닥을 겪어도 괜찮은 거라고.
끝을 알 수 없는 가라앉음을 경험할 때 몹시 당황스럽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떠한 생각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흔들리고 허우적댄다. 멈추고 싶은데, 나를 흔드는 생각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 눈물을 흘린다. 한숨을 내쉰다. 고함을 지른다. 누군가를 히스테릭하게 의존한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는 생각. 그토록이나 나를 흔들고 허우적대게 했던 그 생각에 잡아 먹히고 만다.
그 생각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깟 마음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냐. 오히려 자기혐오의 색은 짙어진다. 그 생각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을 리가 없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시구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조언일 지도 모른다. 한없이 가라앉는 사람의 곁에서 나 홀로 멀쩡하기란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거 남편의 한숨을 이해한다.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되기 전에 모세기관지염을 앓은 큰아이를 키울 때였다. 바다 위의 부표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당최 가다듬을 수 없는 시기였다. 친정은 약 400킬로나 떨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만큼 나에게는 그저 먼 곳이었다. 우리 또래에 흔치 않은 5남매의 막내로 자랐지만, 나를 가까이에서 도닥여줄 형제는 근처에 없었다. 오로지 남편뿐이었다,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출근하려는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지만 그를 내 곁에 묶어두지 못했을 때 나는 홀로 낯선 골짜기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이 아픈 아기를 데리고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밤을 새고 난 뒤라면 나의 그런 기분은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그날이 구토를 일으킬 만큼 심한 기침과 폭발하는 콧물 때문에 누워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기를 밤새 안고 쪽잠을 자고 난 뒤라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밤새 설사하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느라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의 뒤라면...
아기의 정서적 건강을 위해 우선은 엄마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울면, 내가 불안해하면 아이 역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몰랐다. 누구도 얘기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이야기해 주었더라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따위에 관심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으니까.
출산의 과정이 평탄하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다. 그저 사랑의 결실인 아기의 귀여움을 만끽하면 되는 줄 알았다. 소꿉놀이하듯이 젖을 먹이고, 인형 놀이하듯이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자장가를 부르며 잠을 재우고, 황금 변을 누면 웃으면서 기저귀를 갈아주면 되는 줄만 알았다.(‘변이 황금색인 걸 보니 장이 아주 튼튼하구나’라는 어릴 때 보았던 유산균 광고처럼) 그만큼 나는 준비되지 못한 엄마였다. 나를 제외한 세상은 너무 멀쩡해 보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엄마들은 너무 완벽해 보였다. 사랑하는 아기에게 완벽한 엄마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자책이 또 다른 칼날이 되어 나 자신을 무수히 찔러댔다.
“이왕 갈 천국이라면 지금 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 말이 남편에게는 극도로 위험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한숨을 내쉬며 출근하는 대신 남편은 즉시 친정 언니에게 연락했고, 나를 아기와 함께 400킬로가 떨어진 친정 언니네로 직접 데려다 놓았다. 그곳에서 다행히 나는 가라앉은 마음을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수 있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언니의 음식들이 내 몸을 건강하게 해주었고, 조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아기를 제대로 돌보는 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자, 그제야 아기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는 늘 나를 보며 웃었다. 형편없이 서툴고, 못난 생각으로 아빠를 힘들게 했던 보잘것없는 엄마에게 아기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난 엄마가 좋아.”
내가 10년째 섬기고 있는 교육부서는 4세 이하의 아이와 엄마가 함께하는 공동체이다. 그곳에서 육아에 지쳐, 아기를 보면서도 쓴웃음밖에 짓지 않는 어린 엄마들을 만날 때면 나는 얼른 손을 내밀고 싶다. 꼭 20여 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하고 넋두리하는 어린 엄마들에게 난 늘 아기의 웃음에 집중하게 한다. “아이구, 예뻐라. 엄마가 많이 웃어주는구나. 웃는 모습이 어쩜 이렇게 예쁘니?” 그러면 씁쓸한 웃음이 한결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00 엄마는 나에 비해 정말 의연하다. 어쩜 이렇게 야무져?” 나의 서툴렀던 경험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것 같다. 나의 진심을 알아봐 주는 엄마들은 다행히 바닥을 딛고 잘 일어서는 것 같다. 이만큼 자란 우리 집 세 아이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신뢰를 해주는 것 같다. 완전한 공감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봐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함께 일어설 힘을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
큰아이를 양육하며 내가 겪었던 마음의 무너짐이 ‘우울증’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우울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다. 자가진단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주변에서 알아채 주는 것도 중요하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극복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면, 훗날 갑자기 다가온 우울을 조금은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아기의 웃음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엄마는 회복된다. 우리 누군가에게 웃어주는 존재가 되면 어떨까? 나 혼자의 웃음이 당장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작은 웃음 하나하나가 모여 단단한 돌을 이룰 수 있다면. 그 돌이 한없이 가라앉는 누군가의 딛고 일어설 바닥이 될 수만 있다면. 어우러져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저자소개]
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쓰고 뱉다’(글쓰기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7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한 뒤 20년차 주부로 살고 있으며, 초, 중, 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지금은 ‘안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 학교에서 4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머릿결’이라는 필명으로 7권의 웹소설 전자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즐깁니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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