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 나는 부산. 연애 햇수 7년. 그중 그의 취업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장거리 연애 1년. 장거리 연애를 하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과 체력과 감정이 소모됐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했다. 돈을 모아 모든 것을 갖추고 결혼하자는 계획을 버리고 그냥 내년 봄에 결혼하자고. 연애 기간이 길었고, 둘 다 사회인이 되었고, 떨어져 있는 기간이 더 길어지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염려까지. 여러 가지 정황상 결혼의 당위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취업을 해서 월급쟁이가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학자금대출을 갚는 중이었다.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알바나 뛰었던 나는 모아 놓은 돈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둘 다 넉넉지 않은 가정이어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형편도 못되었다. 식장부터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에 들어가는 비용, 신혼여행 경비와 신혼집 마련 등에 들어갈 비용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조언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인데 굳이 결혼이 하고 싶니?’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시기도 적절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미리 내다볼 수 없는 미래는 불안하게 자꾸만 이야기한다. 신중해라.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좀 더 자리를 잡은 다음에 결혼해도 늦지 않다. 적어도 전세금은 마련하고 결혼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쩌면 그 누군가의 조언이, 또는 마음의 소리가 우리를 불행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도록 막아주는 친절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끼고 아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카드빚으로 해결한 당시 나의 마음은 여러모로 착잡했다. 우리의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시작이 빚더미라니! 우리는 당시 정부의 시책에 따라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전세대출을 받기 위해 결혼식에 앞서 3개월이나 먼저 혼인신고를 해야 했다. 이렇게 겨우 마련한 신혼집은 9.9평의 투룸. 최소한의 세간. 처음 신혼집에 들어선 나는 나도 모르게 핑 도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정들었던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남편 하나만 보고 올라온 곳은 너무도 낯설었고 추웠고 초라했다.
사랑하니까 괜찮아. 무수히 내 마음을 도닥여야 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최고 가치를 앞에 두고서도 우리는 사랑스럽지 못한 서로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했으며, 다른 커플들과 비교하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현실이었다. 사랑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의 순수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고 말았다. 순수는 무슨.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현실감각 제로인 순진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이 더 이상 아프기만 하지 않게 된 것은 의외로 단순한 말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넌 잘할 거야.” 무너지려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잘 웃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넌 이곳에서도 잘 해낼 거야.” 나를 믿어주는 신뢰의 말이 내 마음을 환하게 했다. 신뢰는 신뢰를 낳는다 했던가. 나도 똑같은 마음으로 그에게 말해 주었다. “오빠는 못 하는 게 없잖아.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위인은 아니니까 옆에 있을게.” 그렇게 행복은 고작 흔하디흔한 말 한마디에서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완벽한 시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그 틈틈이에 배려, 인내, 성실, 신뢰가 들어가자 우리는 안전할 수 있었다. 상처가 나도 약을 바를 수 있었다. 좌절의 순간 서로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낯설고 추웠고 초라했던 신혼집은 익숙하고 포근하며 더 이상 초라하지 않은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랑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판타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불가능하기만 한 판타지일까? 두 사람이 진정 사랑으로 연합한다면 거기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시너지가 발생되기도 한다. 그것을 배려, 인내, 성실, 신뢰 등으로 이름할 수 있을 터.
이런 것들은 분명 서로의 작지 않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결혼은 하고 싶은데 비정한 현실 앞에서 망설이는 이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가치를 세게 붙잡았으면 좋겠다.
‘완벽한 준비 없이 함부로 불행에 들어서지 마라.’ 그 조언이 굉장히 현실적이며 필수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주저하고 끝내 포기해 버리는 우리의 결혼은 불행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지는가? 애초에 우리네 인생에서 부족하지 않은, 완전한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 중대하고도 고결한 그 일을 앞두고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낭만 하나쯤은 가져보는 게 어떨까?
[저자소개]
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쓰고 뱉다’(글쓰기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7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한 뒤 20년차 주부로 살고 있으며, 초, 중, 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지금은 ‘안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 학교에서 4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머릿결’이라는 필명으로 7권의 웹소설 전자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즐깁니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 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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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티제
결혼 준비하면서 있었던 울고 웃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 판타지와 낭만.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한 주가 되고 싶어지는 글, 잘 읽었어요 :)
쓰니신나
이렇듯 공감을 해주시니 정말 힘이 난답니다^♡^ 감사합니다, 따티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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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오늘
사랑만 으로 행복을 꿈꾸던 그 시절이 다시 생각 나네요 ,,, 20년 전으로 데려가 주셔서 감사해요❤️
쓰니신나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증명해주시는 산증인이시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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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린
저도 사랑 하나만으로 모든 일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ㅎㅎ 곁에 항상 힘을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부러워요~
쓰니신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요! 곁을 조금만 살펴보세요, 힘을 주시는 분들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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