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이윤상]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2024.04.17 | 조회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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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괜찮다

<같이 써요, 책> 챌린지에서 만난 여러 명의 작가들이 써내는 매일의 일상을 공유합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겨울로 가는 길목, 나는 이맘때의 상쾌한 기온을 좋아한다. 구불구불 인왕산길은 나의 최애 길이다. 막힘이 없는 왕복 2차선의 산길은 울창한 나무들과 바위의 조화가 일품이다. 서강대교를 지날 즈음엔 거의 도착했다는 생각에 큰 숨을 들이쉰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의원이 네 손가락을 모아서 까딱거리는 그 특유의 손짓으로 날 불렀다. 업무수첩과 펜을 들고 들어갔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이 보좌관은 보좌진에는 잘 안 맞는거 같아요." 보좌진은 계약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통보로 해고가 손쉽게 이루어진다.

의원과 나는 1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온 사이다. 일을 하며 알게 됐고, 같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나이 차이는 있지만, 드라마 얘기와 세상 불평불만 수다가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어울리던 중 친구는 국회의원이 됐다. 의원이 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보좌진들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말투가 싫다, 조언이 맞지 않는다, 국감 때 나를 곤란하게 했다 등. 그리고는 개원한 지 6개월 만에 한 보좌관을 해고하고, 그 후임 자리를 내게 제안했다. 당시 나는 이전 회사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구직 중이었고, 내 경력이 의원의 의정 관심사와 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나름 시기 적절한 제안이라고 여겼다.

당에 복잡한 민원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의원과 갈등이 발생했다. 오래 기다린 민원인의 입장보다는 당 내 영향력 있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당의 입장에 대해 민원인을 우롱하는처사라고 했다. 의원은 지금 우롱이라고 했어요?”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이후로 의원과 한 차례 면담이 있었고 나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에 사과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의원은 왜 나를 해고했을까? 괘씸하다? 당에 대한 충정심이 부족하다? 정무적 판단력이 떨어진다? 그 어떤 것이라 해도, 10년 가까운 인연을 하루 아침에해고시키는 이유가 되는건지 잘 모르겠다. ‘우롱사건을 놓고 앞으로는 어떻게 일을 하면 좋겠다든지, 적어도 의원실에 근무하는 기간에는 어떤 태도여야 한다든지 제안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로 생각이 안 맞으면 최종 일을 그만둘 수도 있지만, 최종 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본인을 보좌하겠다고 선택한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쥔 자는 정말 글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사람을 잘라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감했다.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데, “어떻게 나한테?”라는 생각이 도통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면 새로운 일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떨쳐버렸을 텐데, 내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그간 해온 경력을 살리기에 외부 환경이 우호적이지 못했고, 50세를 넘긴 나이도 걸림돌이 되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계속해서 귀에 울렸다.

닫힌 문 뒤에 서 있자니 분노만 점점 커져 갔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지인들과 어울려 내 상황을 한탄하며 술도 참 많이도 마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음식점 영업 시간이 단축되어 자연스럽게 집에서 많이 모이게 되었다. 집으로 온 지인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 시간을 견뎌준 배우자에게 지금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된 친구들의 방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시간 여유가 있다보니 친구들을 초대하는데 부담이 없고,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 비용도 절약되어 고정 수업이 없어진 나에게는 아주 적절한 방법이다. 특히 낮 시간에 친구들과 만날 때 집은 편안한 장소가 되어 주었다. 가끔 집에 있는 재봉틀로 친구들의 바지단을 줄여주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타로 리더인 친구가 테이블에 타로 카드를 펼쳐놓고 서로의 인생 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나를 찾아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분노의 시간을 지나는데 힘이 되었다. 물론 분노가 하루 이틀에 사그러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을 건사하는 힘이 늘어났다. 문득 너무 화가 치솟을 때, 내 사정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마치 든든한 보험을 들어놓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내게 생긴 시간의 여유, 거기서 비롯된 마음의 여유는 지인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데 별 일 없는지, 상을 당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재수를 한다던 자녀는 대학을 갔는지, 수술받으신 어머님은 건강하신지, 내가 먼저 연락하고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여유가 있다고 느꼈는지 지인들도 곧잘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충분히 들으면서 내 마음의 여유가 상대방에게도 잘 전달되기를 기원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고, 5, 40시간이 비워진 삶. 비워짐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게 중에는 조금 더 여유있는 사람이 먼저 할 수 있는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바쁠 때 여유있는 친구들이 만날 장소를 찾고 예약하고 찾아와 주었던 일, 내가 울고불고 할 때 그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일, 내가 어렵게 부탁한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해주던 그 일이 이제 내 몫이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글쓴이: 이윤상은 다양한 조직 생활을 갑작스럽게 끝내고, 인생 후반을 고민 중인 50대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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