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배덕감이 느껴지겠지만 실은 고백할 것이 있다. 여행 첫 날 속세와 단절하겠다며 산 속 숙소를 잡아놓고 실은 저녁식사로 교토 중심부에 있는 원스타 프렌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잠깐 실망 말고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일의 특성상 해가 짧은 겨울에 주로 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낯선 곳에서 해가 빨리 진 후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당황하는 일이 많았다. 음식점 외에는 대부분의 장소가 일찍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직행하게 되는 건 역시 투어리스트를 겨냥한 -어느 도시에나 있는 물건을 파는- 장소 뿐이다. 그도 싫으니 숙소에서 은둔하게 된다. 그래서 낯선 도시의 어둠을 이겨내고자 나에게 가장 익숙한 탐험 방식을 하나 섞었다. 든든하게 먹고 마시면 스산해보이는 밤거리도 아름다워보이겠지.
야세를 오고 가는 단 하나의 버스 17번-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2개 정도 노선이 더 있지만 3일 내내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을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어른들을 배려한 것일까? 정류장 간격이 촘촘하다. 그 덕분에 만원 버스 문 끝자락에 매달려 간 나는 사람이 매 정류장마다 내리고 타기를 반복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무작정 주변을 둘러본다. 그래도 여행 에세이이니 무계획 방랑자로서 나름의 여행 팁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언젠가부터 아예 계획 없이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미리 찾아보면 타인의 자주 가본 곳을 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째날, 둘째날은 흥미로운 동네, 거리를 익힌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뒀다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괜찮다 생각이 들면 가본다. 그러면 지도만 들여다보며 걷기보다는 거리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내 취미는 단연코 미식이다. 다들 알겠지만 맛 미味가 아니라 아름다울 미美 자를 쓴다. 경험해보니 정말 그렇다. 감히 미식은 살아있는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오감을 일깨우는 미술관인데 심지어 나한테 맛으로 지적 자극까지 준다고?
그래서 특히 여행을 가서는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나는 미슐랭을 한 번쯤 가보게 된다. 교토는 특유의 미적 감각으로 잘 알려진 천년 수도니까 더욱 더 미식 경험을 통해 이 곳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겠다 싶었다. 관심사 덕분에 어떤 곳을 가야할 지는 이미 인스타 친구들을 통해 직감적으로 추려낼 수 있었다. 예약한 곳은 바로 프렌치 원스타 MOTOÏ 라는 곳.

개인적으로 미식은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끌어올릴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래서 왁자지껄 신나게 수다를 떨기보다는 음식에 집중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사담을 나누다보면 셰프가 만들어 낸 코스가 조연이 되어버리는데 나는 그게 참 아깝다. 그러니까 나는 미식에서 주인공이 아닌 감상자, 관객을 자처한다.

요즘 레스토랑에 가면 메뉴가 메뉴라기보단 사용된 재료만 적어 놓는 경우가 많다. 직접 소통하면서 조리법을 알려주는걸까? 그치만 말로만 전달하면 기억하기에 한계가 있어 다소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모토이는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어떤 형태의 요리가 나오는지를 적어주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이런 메뉴 설명은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했다.

코스가 길어 모든 디쉬를 소개할 수 없으니 두 가지 인상깊었던 요리를 소개하고 싶다.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푸아그라가 수입 금지인 상황이라 내 입장에서는 소중한 외국 특산품이다. 푸아그라는 거위나 오리의 간을 뜻한다. 기름기는 없지만 크리미한 질감과 고기의 농축된 맛이 느껴져 가능하다면 빠떼(Pâté: 고기를 잼처럼 바를 수 있게 만든 일종의 프랑스식 ‘고기 크림’)로 매일 바게뜨에 얹어먹고 싶다. 오늘의 요리처럼 통으로 조리한 푸아그라는 더욱 호사스럽다. 내어온 모양은 단촐하지만 속이 꽉 찬 맛이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와 나눠 먹고 싶어진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린다고 해서 더욱 기대가 됐던 마파두부다. 호불호가 갈리는데 왜 기대가 되냐고? 내 취향이든 아니든 그만큼 특색이 있다는 뜻일거고, 셰프의 킥일 거다. 그가 이끄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서 난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지켜보는 관객, 또는 주인공의 서사를 돕는 조연에 불과하다.
최근 3년 정도 마라탕과 마라엽떡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맛에 일절 어색함이 없었다. 프렌치 정통 코스를 먹다가 너무 느끼해서 힘들었던 파리에서의 식사를 떠올리면, 마라 특유의 매운 맛으로 정신이 들면서 코스 후반부까지 집중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라 맛보다는 '이게 무슨 두부지? 두부를 으깨서는 이런 맛이 나올 수 없을텐데' 라고 생각하게 됐는데, 찾아보니 fromage de soja 라는 건 '콩이나 두유로 만든 치즈'라고 한다. 비건 치즈라는 새로운 세계를 또 하나 알게 된다.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문을 나서니 벌써 밤 10시가 다되어간다. 분명 교토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했는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다. 역시 혼자 제정신으로 돌아다니기엔 좀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풍요로운 시간과 함께 알딸딸하게 돌아다니니 여행 첫 날이 용기있게, 아름답게 흐른다.
하루를 안 먹고 넘기는 것도 힘든 게 사람이다. 그치만 매 끼니가 소중한 게 또 사람이다. 하루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걸 넘어 오래 음미할 수 있는 감각적 경험을 하고 싶다면, 그리고 하필 교토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MOTOÏ를 자신있게 추천해보고 싶다. 교토 전통 가옥에서 모토이 마에다 셰프 군단이 꾸리는 두세시간의 종합 예술 공연은 미식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분명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MOTOÏ (French Restaurant / ★)
✲ lunch: ¥13,200 (¥14,520) - ¥18,700 (¥20,570)
✲ dinner: ¥25,300 (¥27,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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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
오호 제주에서도 미식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예율의 교토
ㅎㅎ 제주가 맛집은 많아도 '미식'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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