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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여기는 집카이브와 함께하는 모두를 위한 ‘우리들의 방'입니다.
안녕하세요, 집카이브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
10월 말로 접어들면서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습니다.
누군가는 슬슬 한 해의 수확을 거두는 시기라고 하지만, 저희는 한창 진행 중인 다양한 작업들이 잔뜩 마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수확하려면 연말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
어느덧 10월 말이 다가오고, 구독자분들께 보내는 세 번째 뉴스레터가 됐습니다.
지난 1호에서는 집카이브의 결성을, 그리고 2호에서는 저희의 프로젝트인 ‘Layered Incheon Project’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3호에서는 저희가 다루는 ‘국민주택'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국민주택이란?"
여러분은 국민주택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국민주택은 요즘에도 흔히 쓰는 단어입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공급하는 면적 25평 이하의 건물을 국민주택이라고 하죠. 그래서 아파트 청약에 관심 있으신 분들도 ‘국민주택'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집카이브가 이야기하는 국민주택은 무엇인가?”
현재는 아파트 청약으로 불리는 ‘국민주택'이지만, 저희는 그 이전의 국민주택을 이야기합니다.
아파트가 보편화된 주거 형태로 자리 잡기 전인 1950년대 말에 등장해 1960년에 활발히 공급된 ‘국민주택'은 공적자금을 활용하여 무주택 서민에게 장기 융자를 해주는 방법으로 건설하여 분양한 공영주택을 말하죠. 당시 주택의 규모는 10평에서 20평 사이로, 아파트 이전 가장 대중적인 주택 유형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원도심을 돌아보면 1960~80년대 지어진 비슷한 모양의 단층 주택들이 나란히 놓인 곳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런 곳들의 다수가 국민주택 단지입니다.
“국민주택은 ‘왜' 만들어졌을까?”
국민주택의 뿌리를 찾기 위해선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말 조선총독부에서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이라는 특수 법인을 설립해 계획적으로 대량의 주택 공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제는 전쟁물자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 노동자들만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한 거죠. 그 예시로 서울 도림동(문래동), 번대방정(대방동), 상도정(상도동)에 영단주택이 세워졌어요.
그러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조선주택영단은 대한주택영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방 이후 정부에 귀속된 토지들에 집중적으로 소규모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법에 따라 대한주택영단을 모체로 대한주택공사가 설립됩니다.
대한주택공사는 1963년 확장된 서울시 행정구역 곳곳에 희망주택, 재건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소규모 계획된 근대도시 주거단지를 부분적으로 건설해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1950년대 말에 등장해 196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국민주택은 서울, 인천, 부산 가릴 것 없이 전국적으로 지어졌죠.
1972년 ‘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해 국민주택 정의가 법제화되면서 사업 주체나 자금 출처, 주택 유형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던 주택의 명칭을 국민주택으로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국민주택'"
대한민국 주거사의 한 획을 그은 국민주택은 1950~60년대 서울을 시작으로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집카이브는 그중에서도 1970년대 인천 미추홀구 용현4동에 지어진 ‘국민주택'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용현4동 국민주택이 역사적, 건축적으로 그 의미가 크냐고 묻는다면 의외로 그 대답이 명확하진 못합니다. 인천의 국민주택은 용현4동과 맞닿아있는 '용현1·3·5동'에도 있고, 재개발이 한창인 주안에도 있었고 서구 가좌동 등 다양하게 퍼져 있었죠. 그리고 지금도 원도심 골목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주택 유형의 한 종류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용현4동 국민주택을 이야기할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평범하기에 기록조차 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6년 말부터 국민주택이 여러 주택을 포괄하면서 확대되었는데, 이때 건설 재원에 따라 차관·민영·공영주택 등 다양하게 불리던 주택 명칭이 국민주택으로 통일됐습니다.
용현4동의 국민주택도 비슷한 시기인 1977년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지어지면서 서로 다른 건설사들이 주택의 구획을 나눠 이름을 정하기도 했죠.
용현4동 국민주택 단지는 ‘용현·용일·국제' 세 곳의 구역으로 나뉩니다.
용현4동에 국민주택 단지가 있었다는 것도, 이곳이 용현·용일·국제주택 세 곳으로 나뉜다는 것도 집카이브가 기록하기 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오직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져왔고, 이마저도 재건축 재개발로 주택의 다수가 사라져 일부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집카이브는 용현4동 국민주택을 표본으로 인천의 사라져가는 주거사의 일부를 수집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민주택"
도시의 주택 문제 해결과 주거 근대화라는 목표로 한국 주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국민주택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주거사의 역사적 전환기라 불리는 1950~70년대를 지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호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주택 시장의 변화와 도시 개발로 인해 하나둘 사라지고 있지요.
전국 각 지에서 재개발 구역에 대한 기록 작업을 펼치고 있지만, 대다수가 근대건축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오래되었고, 이제는 그 유형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역사적·건축적으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자체 혹은 박물관 등의 공공기관, 이외에도 민간 차원의 기록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오래된 현대의 주거 형태인 ‘국민주택'은 근대건축과 함께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사정이죠. 한국 주택생태계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작동했으며 수십 년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던 국민주택. 하지만 너무나 평범하고 흔하다는 이유에서 의식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신 구독자분들이시라면, 이제는 우리 일상 속 사라져가는 집과 주택에 대해 다시 한번 관심을 가져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조금 진지했죠? 때로는 편안한 수다로, 또 때로는 진지한 연구로 여러분께 집카이브를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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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택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에는 용현1.4동 국민주택을 꼭 닮은 '집카이브 로고'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보낸사람
은비✍ 화연👣 진진🐝 일공🐜 은샘🎬 채연🛋️
은비✍ : 인천을 덕질하는 학익동지킴이
화연👣 : 도시의 틈새를 살피는 창작자
진진🐝 : 화수동에서 도르리하는 산책자
일공🐜 : 화수동에서 그림그리는 개미
은샘🎬 : 영상하는 인천에서 태어난 딸
채연🛋️ : 집을 사랑하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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