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국민주택 이전, 용현동을 일구었던 ‘국민’ 아닌 화교 이야기

한때 화교들의 밭이었던 용현동

2025.05.14 | 조회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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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청년들이 수집하는 집에 쌓인 이야기 📪 [1번지 용현동 국민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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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여기는 집카이브와 함께하는 모두를 위한 ‘우리들의 방'입니다.

인천의 역사를 말하면서 화교를 빼놓는다면, 절반은 지우고 쓰는 셈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인천은 화교와 깊고도 오랜 인연을 맺어온 도시인데요,
집카이브가 관심을 두고 있는 용현동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국민주택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수많은 화교들이 밭을 일구며 삶의 터전을 가꿔온 공간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묻힌 시간의 흔적을 따라, 용현동의 화교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화교의 탄생 : 중국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대만으로


용현동의 화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화교’란 누구일까요?
흔히 그냥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속사정이 있습니다.
화교는
19세기 말 ‘중국 본토’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대한민국에서 ‘대만 국적자’로 살고 있는, 우리의 아주 오래된 이웃입니다.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차근차근, 초기 화교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교류와 이동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교는 근대적인 조약에 따라 청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고, 조선에 이주해 왔다는 점에서 이전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1884년, 청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인에게 일정 구역의 거주와 경제 활동,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계’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은, 바로 청국이 해외에 설치한 최초의 조계지였습니다.

「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에 표기된 청국 조계 (ⓒ인천광역시 홈페이지, 사진으로 보는 역사)
「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에 표기된 청국 조계 (ⓒ인천광역시 홈페이지, 사진으로 보는 역사)

청 정부의 계획에 따라 인천에는 화교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상당한 자본을 보유한 무역 상인 계층이었으며, 조계지 내에서 지대를 지불하고 토지의 영구 사용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인천과 화교 사이 인연의 시작입니다.

1886년 10월 화교 택지 입찰 기록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1886년 10월 화교 택지 입찰 기록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분명 화교들은 중국 본토에서 이주해 왔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교의 국적은 ‘대만(중화민국)’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중국 대륙은 공산화되었고, 국경 역시 폐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한에 남은 화교들은,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합법적 중국 정부로 인정받던 ‘중화민국’을 새로운 조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남한 화교 사회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그 결과 화교 사회는 점차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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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동에서 밭을 일군 화농(華農)


다시 19세기 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된 지 1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두 제국은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충돌합니다. 전쟁의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고, 그 여파로 무역업에 종사하던 화상(華商)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인천과 기후가 비슷한 산둥 지역에서 건너와 채소 농사를 짓던 화교, 즉 화농(華農)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농부는 땅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산둥에서 들여온 채소 종자로 배추, 파, 오이, 고추, 중국 미나리, 시금치는 물론, 조선에서 보기 드물었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을 재배했습니다.
심지어 1920년대에는 조선의 채소 농사 기술 부족을 이유로, 일본이 주도하여 산둥 지역의 농민들을 일종의 ‘농업 용병’으로 조선에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화농들은 경동, 신포동, 용현동, 주안, 부평 등 인천 전역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갔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논이 아닌 밭작물 중심의 경작을 하였고, 넓은 토지를 확보해 상당한 규모로 운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1950년대 후반까지도 용현동에는 청관(淸館, 현 차이나타운) 못지않게 많은 화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농촌에 사건들이 많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들이 배추 훔치다 걸려서 못 하게 하면 때려서 많이 다치는 일이 있었어요. 그 당시는 한국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물론 다른 지방은 있었는지도 몰라도 인천에서는 농사짓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다 화교들 소유였기 때문에.

화교 곡○○의 증언,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국립민속박물관, 2012)』에서 재인용

 


한때는 화교학교도 세워졌지만


용현동에 거주하는 화교 인구가 증가하면서, 1951년에는 이 지역에는 화교학교 분교가 세워졌습니다.평산분교’라고도 불렸던 이 학교는 오늘날 홈마트가 들어서 있는 용현동 50-3번지에 위치하였습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지금은 일부 사라진 옛 인천가도가 지나던 길과 매우 가까운 자리였습니다. 

화교학교는 저기에 있었어. 어디 있었냐면, 용현4동에 제운사거리 가기 전에 큰 마트 자리. 우리 어렸을 때 거기에 빨간 벽돌로 화교 학교가 있었어. 거의 다 중국 사람들이야.
거기 일대가 다. 학익동이랑 옆 용현동 쪽으로는 중국 사람들이 다 잡고 있었어. 중국 사람들 땅이었어.

한국인 주민 이○○ 증언, 1963년부터 현재까지 용현동과 학익동 일대 거주

 

용현동 일대에 펼쳐진 밭과 용현분교 추정 자리(1969) (ⓒ국토정보플랫폼 항공사진)
용현동 일대에 펼쳐진 밭과 용현분교 추정 자리(1969) (ⓒ국토정보플랫폼 항공사진)
용현동 일대에 펼쳐진 밭과 용현분교 추정 자리(1969) (ⓒ네이버 지도에 필자 표시)
용현동 일대에 펼쳐진 밭과 용현분교 추정 자리(1969) (ⓒ네이버 지도에 필자 표시)


한때는 학생 수가 많아 활기를 띠던 학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학생 수가 급감하여 결국 1987년 7월 폐교되었습니다. 이는 용현동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화교 공동체의 쇠퇴와 변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화교들은 왜 용현동을 떠나야 했을까요?

용현분교 1965년 졸업사진 (ⓒ114년의 기억, 한국인천화교중산중소학(인천문화재단, 2015))
용현분교 1965년 졸업사진 (ⓒ114년의 기억, 한국인천화교중산중소학(인천문화재단, 2015))

가장 큰 전환점은, 화교들이 밭을 잃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화교의 경제력을 견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그중에서도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조치는 화교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화교들은 채소 농사를 짓던 밭을 더 이상 소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부 화교는 한국인 명의를 빌려 토지를 유지하려는 편법적인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사기와 배신으로 토지를 빼앗기거나 몰수당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천의 화교 농업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화교들은, 중국 음식점 경영으로 생업을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던 용현동의 땅은,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거치며 한국인들의 ‘국민’주택 단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화교는 진짜 배짱 없으면 짜장면 장사하기가 굉장히 하기가 힘든 시절이에요.
그런 사람 맨날 가서 저런 뭐 땡깡 부리면 재주가 없어요. 그래서 신체 단련을 많이 시켰어요. 그리고 협회 차원에서 청년단을 조직했어요. 왜냐하면 농사짓더라도 가끔 와서 배추 이렇게 훔쳐 가는 사람들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방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청년단을 결성했어요.

화교 곡○○의 증언,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국립민속박물관, 2012)』에서 재인용

 

연 : 용일초등학교 앞에도 다 밭이고, 중앙메디칼의원(인주대로 282) 있는 데도 다 호박밭이고 아주 길도 없었어. 그래서 밤낮 하수도도 안 되고. 아이구..

곽 : 여기 지금 제운사거리에서부터 신기촌까지 저기는 다 중국인들 호박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 올 때 장화 신지 않으면 못 다녔어.

연 : 그땐 아스팔트도 없었지.

곽 : 그렇지. 그냥 다 황톳길이야. 뻘건 황토.

한국인 주민 곽○○, 연○○ 증언, 1977년부터 현재까지 용현동 거주


참고 자료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 (2012)>, 강경표, 안일국, 국립민속박물관
<114년의 기억, 한국인천화교중산소학: 1902-2015 (2015)>,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동아시아 현대사 속의 한국화교: 냉전체제와 조국 의식(2013)>, 왕은미 (송승석 ), 학고방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 인천화교엽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2015)>, 이정희, 송승석, 학고방


 

💌
한때 용현동은 밭이었고, 그 밭에는 화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일구고 채소를 재배하며 인천의 식탁을 책임졌고, 또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우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과 도시 개발, 국민주택 단지 조성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화교들은 삶터에서 점차 밀려났습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용현동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을 따라가며, 지워진 존재와 역사를 다시 펼쳐보는 일이 우리의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9호에서는, 화교들이 운영하던 당면공장의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


보낸사람
은비✍ 화연👣 진진🐝 

 

은비✍ : 인천을 덕질하는 학익동지킴이
화연👣 : 도시의 틈새를 살피는 창작자
진진🐝 : 화수동에서 도르리하는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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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선

    0
    7 months 전

    1969년 사진에도 용일초등학교와 인천기계공고가 뚜렷이 보여서 놀랍습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덮이기 전의 용현동-주안동-학익동이 황토밭이었다는 점을 이번 뉴스레터를 통하여 새로이 배우고 갑니다. 황토에서는 물이 고이질 않아 논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밭 농사를 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산둥성 화교 입장에서는 중국 황하와 용현동이 비슷한 토질이었으니, 고향에서의 농업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용현동 뿐만 아니라 중구 개항장에서 문학동으로 이어지는 땅의 토질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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