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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여기는 집카이브와 함께하는 모두를 위한 ‘우리들의 방'입니다.
어떤 인사로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많은 고민이 되었던 2024년의 끝을 지나, 긴 공백기를 넘어,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습니다.
지난 공백의 시간 동안 저희는 각자의 일에 집중하며 일상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25년의 1분기가 지나 4월이 되어서야 구독자분들께 보내는 다섯 번째 뉴스레터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들도 많지만 삼키게 되며 쉽게 안부를 전하지 못했던 작년 연말,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지난 4호에서는 우리들의 집과 꼭 닮은 저희의 로고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오랜만에 돌아온 5호에서는 용현4동 국민주택으로 흘러들어온 집카이브 팀원 은비네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70년 7월 6일
태수*는 인천 만석동의 판유리공장에 취직했다.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서 태어난 태수는 한국전쟁으로 부모님과 피난 내려와 용인에 정착했다. 그렇게 용인 유방동 무수막에서 군대까지 제대하고, 다음 해 스물다섯이었던 1970년 운 좋게 아버지 친구였던 인천세관장 추천을 받아 인천 판유리공장에 취직하며 인천으로 올라왔다.
인천 판유리공장은 동구 만석동에 있어 ‘만석동 판유리공장’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인천 판유리공장은 충주 비료공장, 문경 시멘트공장과 함께 3대 기간산업*으로 성장해서, 판유리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얼굴도 안 보고 딸을 시집보낸다고 할 정도로 돈을 잘 주는 곳이었다.
태수는 취직하자마자 용인에서 인천으로 이사해야 했지만, 다행히 인천은 그에게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황해도에서 함께 피난 내려온 외가댁이 모두 동인천 일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방학이 되면 태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용인에서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신포동에는 이모님 댁이, 송림동에는 외할머니와 삼촌들이 계셨기에 방학이면 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와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착해서 살아야 할 곳이 되었고, 송림동 샛골 전세방에서 태수는 첫 신혼집을 구했다.
* 태수 : 팀원 은비네 할아버지의 가명
* 기간산업(基幹産業) : 한 나라의 경제활동을 원활히 하는 데 필수적인 산업으로, 한국전쟁 이후 정부는 전후 복구와 경제 재건을 위해 인천 판유리공장, 충주 비료공장, 문경 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1977년 12월 30일
태수는 첫 신혼집이었던 1970년 좁았던 샛골 단칸방에서 1972년 한일시장*의 전셋집, 1973년 독쟁이*의 셋방을 거쳐 1975년 드디어 주안동에 본인 명의로 된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주안동에서 막내딸을 낳고, 부모님을 모셨다. 하지만 장성한 형제들까지 인천으로 상경하며 이내 집은 비좁아져 좀 더 넓은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1977년 12월, 발이 넓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용현4동에 국민주택을 웃돈 주고 구매했다. 원래 학익동의 국민주택을 신청했으나 떨어졌고, 근처에 비슷한 가격대에 새로 지은 좀 더 넓은 집을 찾던 중 발견한 곳이었다.
그리고 1977년 12월 30일, 본래 집 주인에게 매도증서와 함께 건축물대장과 집문서를 받았다.
23평의 평평한 슬라브 지붕에 작은 광*과 마당이 딸린 1층 주택.
용현주택이라 불리는 국민주택이 태수와 가족들의 집이 되었다. 얼마 뒤 1978년 초 추운 겨울날, 태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내와 세 아이, 장성한 동생들까지 함께 용현주택으로 이사 왔다.
* 한일시장 : 현재의 용현시장(용현동 492-80)을 다르게 부르는 말, 1960~70년대 시장 안에 ‘한일극장’이 있었기에 ‘한일시장’이라고 불렀다.
* 독쟁이 : 용현동 용현사거리에서 주안동과 용현동 경계인 용일사거리 쪽을 향해 올라가는 언덕길을 부르는 지명
* 광 : 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으로, 창고와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다.
1991년 9월
시간이 꽤 흘렀다. 78년 용현주택으로 이사 온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장성한 동생들은 각자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출가했고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셋방을 따로 만들어 세를 주기도 했다. 판유리공장 봉급이 많다곤 해도, 많은 식구들을 챙기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집을 쪼개 세를 받았다. 젊은 신혼부부부터 가까운 인하부고 배구부 감독이 살기도 했다. 때로는 좀도둑이 들어 집이 난리가 난 적도 있지만, 세를 놓는 게 집안 살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도 돈벌이를 위해 종종 소일거리를 찾아 나갔다.
그렇게 이 집에서 동생들을 출가 보내고, 세 아이를 키웠다.
8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로 불편한 집을 여기저기 뜯어고쳐 입식으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셋방을 주느라 만들어 둔 또 다른 부엌과 아궁이를 없애고, 우리 집이 사용하던 아궁이와 온돌도 보일러로 고쳤다. 그리고 다락을 없애고 방을 만들어 태수네 식구끼리 살기 좋은 집으로 리모델링을 마쳤다. 외부에 있던 푸세식 화장실도 이제는 실내에 증축해서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집이 되었다.
태수네를 제외한 주변 집들에도 변화가 생겼다.
1층 단독주택이었던 국민주택들은 하나, 둘씩 팔려나가 다세대, 다가구주택이 들어왔오며 근처 인하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하숙방, 기숙방이 늘어나며 최근에는 ‘원룸’이라는 형태의 자취방이 등장했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기에 최근 업자들의 빌라 건축이 한창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정을 나누던 이웃들은 아이들이 장성하자 동네를 떠나가기 시작했지만, 태수는 여전히 용현동에 남아 셔틀버스를 타고 판유리공장으로 출근했다.
2025년 4월
집을 리모델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95년도에 첫째인 큰아들이 결혼을 했다. 그리고 97년도 막내딸이, 뒤이어 98년도 둘째 아들이 결혼하며 모두 출가를 했다. 태수는 96년 명예퇴직을 하며 아이들에게 근처 용현동, 주안동, 학익동 일대에 가깝게 신혼집을 마련해줬고, 95년도 큰손주가 태어나며 할아버지가 됐다.
함께 복작복작 용현주택에서 살았던 이웃들은 어느덧 한두 곳 정도만 남고 모두 떠났다. 연세가 많아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이웃도 있다. 그나마 최근까지 옆집에 남아있던 병훈엄마는 남편과 사별한 후 요양병원에 들어가며 더 이상 소식을 알 수 없다.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이웃들은 모두 노인이 되었고, 다수가 용현동을 떠났다. 인하대학교 학생들로 가득했던 자취방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며 동네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2016년 인하대학교 정문에 수인선 전철이 개통되고 일대가 재개발되며 중심가가 변화했다.
이제는 학생들이 인하대 정문의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에서 자취하기 시작하면서 태수네가 있는 인하대학교 후문 일대는 원도심처럼 남아 학생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총 27호였던 용현주택 중 다수는 다세대, 다가구 주택으로 바뀌었고, 그중 남은 건 단 4채뿐이다.
근처 국제주택, 용일주택에도 회사 동료와 성당 교인들이 살았으나 이마저도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거나 이사 가며 이 동네에 터줏대감으로 남아있는 건 태수네를 포함해 몇 곳 되지 않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일대가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태수네 용현주택이 있는 일대가 옆 동네 학익동 일부와 합쳐져 ‘학익5구역’으로 재개발사업 정비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동네에 서면 동의서 사인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빈 집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수는 아내와 하늘을 바라보며 ‘적어도 우리가 죽고 나서 되지 않겠어?’라고 재개발 현수막을 가리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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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카이브의 첫 번째 프로젝트 지역인 용현4동의 국민주택은
팀원 은비의 할아버지가 50년 가까운 시간동안 살고 계신 곳이에요.
용현4동 국민주택으로 흘러들어온 곽씨네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다음에는 용현1.4동 국민주택을 실측하며 느낀 현장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보낸사람
은비✍ 화연👣 진진🐝
은비✍ : 인천을 덕질하는 학익동지킴이
화연👣 : 도시의 틈새를 살피는 창작자
진진🐝 : 화수동에서 도르리하는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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