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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기는커녕 짙은 어둠이 언제나처럼 퇴근길에 내려앉는다."

2024.04.05 | 조회 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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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푼수 단편선

조각 같은 우리들 이야기를 씁니다.

 "그러게 일찍 나와서 미리 준비 좀 하고 있으라니깐... , 듣고 있니?"

 어깨너머로 날이 선 사장의 목소리가 나를 쏘아붙였다. 조끼와 헬멧은 진작에 챙겼지만 어째서인지 캐비닛 안에 있어야 할 오토바이 키가 보이지 않았다. 복합상가 이 층에 자리 잡은 중국집이었지만 창이 없는 탓에 햇빛은 들지 않았다. 슬프게도 인간이란 족속은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실낱같은 빛 한 줄기를 기대하는 법이다.

 키는 결국 조끼 주머니 안에서 찾아냈다. 어제 퇴근할 적에 조끼와 함께 그대로 캐비닛에 처박아놓고서는 금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무어라 역정을 내는 소리-어쩌면 고함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를 뒤로하고 첫 배달을 나갈 때는 평소보다 이십 분 정도 늦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도로는 얼마나 한적해졌는지 아침마다 건물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나로선 생경할 따름이다.

 오전 배달을 열 번 나간다고 치면 그중 일곱 여덟은 근처 재개발 구역의 공사를 도맡고 있는 건설업체 직원들의 주문이었다. 시키는 메뉴는 대부분 짜장면이나 볶음밥이다. 현장에서 제일 막내로 보이는 직원이 무뚝뚝하게 걸어 나와 카드를 내밀었다. 마지막 그릇을 내려놓을 때쯤이면 그제야 다른 직원들 서너 명이 터덜터덜 뒤따라와 음식 옮기는 것을 돕는다. 나는 다만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과 일하기 위해 먹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비참한지 떠올려보다가 이내 그만뒀다.

 정오가 돼가면 주문이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두 시간 가량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평범한 사람들-그러니까, 적당히 이른 오전 시간에 출근카드를 찍은 후 개인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여의도의 샐러리맨이라든가, 한강 둔치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꽃 구경을 나온 부부와 그들의 자녀라든가-의 식사 시간이 되기도 했거니와 오전에 배달한 음식 그릇들을 수거해야 할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일회용기 좀 쓰자고 구시렁댔다가 내 월급에서 까서 사면 되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입을 싹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한창 바쁜 타임이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도 때늦은 점심시간이 주어진다. 대행업체 소속들은 임금에 식대를 포함한 뒤 알아서 해결하게끔 한다는데, 우리는 이 가게에 전속되어 그런지 깐깐한 사장치고 점심시간은 나름 잘 지키는 편이었다. 보통은 짜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는데 그마저도 배달 일이 없을 때나 맘 편히 먹을 수 있었고, 중간에 콜이라도 온다면 누군가는 짜장면을 뒤로 하고 배달을 가야 했다. 이 경우에는 우리끼리 미리 정해놓은 순번을 내보내는데 돌아와서 다 불어 터진 짜장면을 씹어 먹고 있노라면 그보다 더 착잡한 마음이 들 수도 없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주문 자체는 줄어들지만 주문 장소는 훨씬 다양해진다. 가정집부터 시작해서 당구장이나 대학교 기숙사는 물론이고, 밤늦은 시간에는 각종 유흥시설이나 숙박업소에서도 주문이 꽤 들어온다. 가장 골치 아픈 경우가 바로 모텔인데 아주 가끔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자가 벨을 누르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나올 때가 있다. 대개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음식을 공짜로 두고 가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심산인데, 억울한 건 둘째치고서라도 방 안에 짓궂은 표정으로 누워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칠 때면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온몸이 사로잡혀버리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모두가 말이 없다. 저마다 시체처럼 돌아와서 무슨 말을 꺼낸다 한들 얘기하지 않느니만 못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신세를 한탄해서 세상이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뀌기는커녕 짙은 어둠이 언제나처럼 퇴근길에 내려앉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에 고꾸라진 나는 꿈도 꾸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었다. 내일도 해는 뜰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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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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