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니까요."

2024.02.04 | 조회 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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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푼수 단편선

조각 같은 우리들 이야기를 씁니다.

 "솔직히 이 형은 말이야, 잘 이해가 안 돼. 네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좀 잘했어야지. 난 네가 정말 판사나 검사...... 하다못해 변호사라도 될 줄 알았다니깐. 그 성적으로 방송쟁이 시다바리나 된답시고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인지 뭔지, 별 요상한 과에 가더니 이게 다 뭐냐." 대훈이 형은 건물 뒤꼍 화단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대학까지 졸업해놓고 백수 나부랭이나 돼서 이렇게 카페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에이, . 이직하기 전에 잠깐 머리 식히는 거라니까요. 집 안에만 있으면 너무 답답하니까......" 내가 멋쩍게 대답했다.

 "개뿔! 이직은 뭐 아무나 시켜주나. 어쨌든 네가 선택했으면 뭐가 됐든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버텨냈어야지. 뭘 저지를 거면 부모님 생각도 좀 해가면서 저질렀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걸 취재하라는데 어떡해요, 그럼."

 "누가 너보고 책임지래? 그냥 영상 찍고 편집이나 하라는 거지."

 "저도 나름 정의가 있는 사람이에요."

 "말은 좋지." 대훈이 형은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카페 사장이 담배 피워도 돼요?"

 "어차피 음료는 네가 다 만들잖아." 라이터 불과 맞닿은 담배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야 뭐,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딴 놈이니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봐."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정말로요." 어쩐지 나는 해명하고 있었다.

 "정의도 유분수라는 거야. 결국 그만큼 상대적인 거니까. 누구 하나 잘못하는 사람 없이 성인군자처럼만 살면 세상에 정의라 할 게 따로 있겠냐는 말이지. 네가 멀쩡한 직장 관두고 나온 것도 다 그런 정의감 때문이잖아? 그럼 반대로 하나만 물어보자. 네가 지금껏 탐사 보도 뛰면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었던 건 다 누구 덕분이지? 그런 정의감 하나 없는 분들 덕분 아니야? 자, 네가 보기엔 어때. 그런 인간들 덕 보는 너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내가 어물쩍대며 대꾸했다.

 "내 말이! 그게 그렇게 되는 게 맞냐고." 대훈이 형은 바로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결론은 이거야. 각자 상황에 맞게 주어진 정의가 따로 있다는 거. 지금 너는 손님들한테 맛있는 음료를 만들어주면 그만이고, 난 너한테 얘기했던 대로 일급이나 똑바로 챙겨주면 돼. 그게 지금 난 담배를 태울 수 있고, 너는 그러지 못하는 이유지. 너와 내 정의는 서로 다른 것뿐이잖아? 틀린 게 아니라."

 "하긴 그렇긴 하죠.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니까요."

 "각자 먹고 살 만큼만 정의로우면 되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시대에 문제의식을 불어넣고...... 뭐 그런 거창한 정의는 거창한 분들이 하실 일이고. 그걸 나처럼 수학의 정석 한 권도 다 못 뗀 놈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런데 그거 알아? 그 정도 정의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도 여기 이 동네 카페 중에 우리가 제일 잘나간다는 거. 정말이야,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돼. 인터넷에 익선동 카페만 검색해도 우리 가게 후기가 제일 많아. 대단하지 않냐? 누구 하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일궈냈어. 이게 중졸 신화가 아니면 또 뭐야. 하하!"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나는 진심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그냥 네가 좀 행복했으면 하는 거야. 너는 인마, 이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제수씨 될 사람도 있는 마당에 아직도 뜬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어떡해! 그런다고 갑자기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그래도 오리로 태어난 게 다행인 줄 알아. 누구처럼 개미로 태어났으면 평생 땅속에만 박혀서 살 수도 있었다고." 대훈이 형은 앉아있던 곳에서 일어나 담배를 비벼 껐다.

 "글쎄요, 개미치고는 많이 성공한 것 같은데."

 "아휴이걸. 대꾸라도 안 하면......" 대훈이 형은 못내 내 머리를 헝클었다. "들어와. 저녁 되면 손님 많아진다."

 "암요, 들어가야죠. 정승같이 쓰는 개미가 되려면......" 나는 히죽거리며 대훈이 형을 뒤따랐다.

 나는 대훈이 형네 카페에서 두 달쯤을 더 일하다가, 타 방송사 예능국의 한 부서에 조연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방송쟁이들은 날 새는 게 일상'이라던 대훈이 형은 재취업 기념이랍시고 사십만 원짜리 커피머신을 선물로 보내왔다.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나서 기획된 프로그램은 메가 히트를 쳤다. 팀장은 기획 회의 때 조연출 입에서 툭 내뱉어진 한마디가 이렇게 대박을 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기 무섭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나는 대훈이 형과 더 이상 연락할 수 없게 됐다. 어쩌다 전화를 걸어봐도 이미 나를 차단했는지 발신 자체가 걸리지 않았다. 반차까지 내고 카페를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빈 건물에 임대 문의 공고가 붙은지 오래였다.

 한편 건너편 자리에 새로 생긴 카페는 평일 대낮부터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대부분이 '연예계 톱스타 출신 A의 창업 도전기'를 다룬 솔루션 제시형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감정도 없이 카페에 들어가서 콜드브루 하나를 주문했다. 각오는 했지만 더럽게 쓴맛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대훈이 형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분수에 맞는 정의대로 산 대가가 서로를 영영 잃게 되는 일인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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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과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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