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 사사의 레터]
🌪️ 교토 토요 태풍주의
1.
비 오는 교토는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이호지에 갔습니다. 교토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사원이에요. 120여 종의 이끼가 자생해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정원은 인식의 장소입니다.”
정원 쉼터에서 클리어파일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정원 관리원인 미야자키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뽑아뒀더군요. 그가 말하길, 정원은 인식의 장소입니다. 자연과 일하면 저절로 나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완벽하게 정원을 쓸어도, 그 다음 날 나뭇잎은 떨어집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빗자루를 들어야 합니다.
청소할 때 꼭 빗자루를 사용해야 하는데, 너무 세게 쓸면 이끼가 벗겨진대요. 그래서 사원 부지의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든대요. 대나무를 직접 자르고, 가지를 제거하고, 말려서요. 빗자루를 만들며 다음 계절을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음 계절을 생각하며 ‘나’를 마주하는 곳. 그게 바로 좋은 정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관리한 정원은 과연 아름다웠어요. 청록색 이끼가 걸음마다 눈에 밟혔습니다. 물들지 않은 단풍잎엔 빗방울이 맺혀있었구요. 좋은 정원은 다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가을인 지금은 ‘단풍이 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했습니다. 가을엔 ‘낙엽이 지고 마른 가지에 눈이 내려앉으면 어떨까’ 기대하겠죠.
2.
비 오는 교토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정도껏 내려야지요. 오늘 교토엔 폭우가 내렸습니다.
“교토시, 카모가와는 탁류에 호우, 홍수 경보가 계속 중”
실은 사이호지 입장료가 무려 4000엔(약 3만 6094원)입니다. 예약해 두었으니 호우 경보가 내려도 가야지요.
원래 근처 아라시야마를 쭉 둘러보려고 했는데요. 비가 너무 와서 사이호지만 보고 바로 숙소로 왔습니다.
완벽하게 코스를 짜도 꼭 변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코스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행입니다. 회사 프로젝트라면 이해관계가 줄줄이 얽혀있겠지만, 여행 계획이 달라지면 뭐 어때요. 비가 오면 뭐 어때요. 양말하고 바지 좀 젖었을 뿐이죠.
같이 온 근성백이 이러더라고요. “다음에는 꼭 날씨가 좋을 때 와야지.” 다음을 생각하며 ‘나’를 생각하는 곳. 정원은 과연 인식의 장소인가 봅니다.
[10년 차 근면성실백수의 레터]
🚂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이유에 대하여 ‘나를 찾기 위해’ 떠난다고 하는 사람이 꽤 있죠. 저는 반대로 ‘나를 잊기 위해’ 온 것 같습니다.
퇴사를 하고 한국에 있을 때는, 작은 내 방으로 각종 생각들이 날아왔습니다. 그때 내가 잘 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구직을 시작해야 할까, 요즘 경기가 안 좋다던데 등등등. 익숙한 곳에서는 새로운 자극이 없어서 각종 생각에 파묻힌 저를 환기시켜줄 게 없었어요.
교토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납니다. 편의점, 버스, 신호등도요. 그런 새로움으로 매일이 채워지니 잡다한 생각을 덜하게 돼요.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닌, 진짜 신기하고 좋아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감각이 오랜만입니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저는 평일 연차를 쓰고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취향에 꼭 맞아서 정신없이 몰입했어요. 전시가 끝날 무렵, 정신이 물로 씻어낸 듯 시원해진 게 느껴졌습니다.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몰입이 너무나 필요한 상태였었나 봐요. 그런 경험이 들어오니 메마른 나의 정신이 스펀지처럼 쏙 흡수해버린 거죠.
교토에는 창밖 정원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실내는 인공적인 밝은 불을 켜지 않아 적당히 어둑합니다. 그와 대비되어 창밖은 눈이 부시게 환하죠. 거무튀튀한 처마 아래로 푸른 나무와 풀과 이끼가 시야 가득 들어옵니다. 작은 개울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와요. 교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도 잡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러다 오늘은 의식적으로 빗소리와 푸른빛에만 집중해 보기로 했어요. 이때 여행 오기 전 들은 명상 수업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명상에서는 떠오르는 생각을 멀리하고 지금 느껴지는 나의 감각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지금으로 온 감각을 채우며,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그 감각을 찾고 싶었어요.
가레산스이를 보면서도 회사 생각이 떠오르다니 노답입니다. 교토에 와서도 회사 생각, 구직 생각이나 하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너무너무 아깝잖아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것만 한가득 겪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비록 레터를 쓸 때는 예전의 현실을 떠올리지만요.
PS 1. 감기에 걸렸다고 어제 전했었죠. 지난밤 내내 제대로 못 잤고 약 기운 때문에 정말 하루 종~일 졸려요. 그러다 보니 잠깐의 낮잠을 위해 침대로 기어 올라가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이런 게 행복인 걸까요.
PS 2. 배탈이 나서 배가 아프고 열이 나서 추워도, 편의점 가서 하겐다즈 고구마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존맛. 같이 산 밤크림빵도 존맛. 이런 게 행복인 걸까요.
💌 다음 레터도 내일 밤 9시에 보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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